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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May 10. 2023

호남 3대 명촌 3

전남 영암군 군서면 구림(鳩林)마을

적어도 영암(靈岩)을 이야기할 때 월출산(月出山)이 들어가지 않으면 '팥소 없는 찐빵'이 될 것이다. 영암 월출산(해발 809m)은 소백산맥의 끝자락에 우뚝 솟은 호남의 소금강으로 글자 그대로 '달이 뜨는 산'이다. 삼국시대에는 '달이 난다'하여 월라산(月奈山)이라고 불렀고, 고려시대에는 월생산(月生山)이라고 부르다가 조선시대에 와서 월출산으로 불렀다.


역사적으로 영암은 백제시대에는 월나군(月奈郡)이던 것을 통일 신라시대인 757년에 영암군(靈岩郡)으로 개칭하였다. 영암은 고인돌, 청동기시대의 마을터 등이 발견돼 이곳이 오래전부터 살기 좋은 고장이었음을 증명해 준다. 로부터 강진, 해남 등 남쪽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 시험을 보러 가기 위해 월출산을 넘었고, 정치적 탄압을 받은 선비들은 한양에서 삼남대로를 거쳐 월출산을 넘어 강진, 해남이나 제주도 등으로 귀양을 갔다. 출세를 위해 한양으로 가던 길이든 유배생활을 시작하러 제주로 가던 죄수든 기암괴석과 수려한 산세를 보며 감상을 남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선조들이 남긴 월출산의 시 두 편을 감상해 보자.


조선시대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은 전라도 관찰사로 영암을 순찰하던 중 월출산 정상을 바라보며 공무에 바빠 오르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함과 동시에 월출산이 자신의 고향 가야산(伽倻山)과 흡사함을 보고 고향 생각에 잠긴다.


등불 켜고 자리 걷지 않은 채 밥 먹고 서성대기 괴로워라

달이 산꼭대기에서 뜨고 해가 뜨는구나

뭉게뭉게 뜬 구름은 동혈(洞穴)에서 걷히고

뾰족뾰족 가을 산은 기이하고 하늘은 푸르구나

떠도는 인생 반이 넘도록 이름 들은 지 오래이고

정상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니 세상일 바쁜 탓이라

가야산과 닮아서 참으로 기쁘구나

괜스레 말을 타고 고향 생각에 젖노라


다산 정약용(1762~1837)도 1801년 유배길에 나주 반남정에서 하룻밤을 지낸 형 정약전과 이별하고 월출산의 황치(黃峙), 즉 누릿재 또는 누리령을 넘어 강진으로 갔다. 18년의 기나긴 강진 유배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누릿재를 넘는 다산의 시가 전해지고 있다. 시에 등장하는 월남리는 강진군 성전면 소재 마을 이름이다. 월출산 누리령에는 형제의 우애가 특별했던 다산의 눈물도 보태졌을 것이다. 


누리령의 산봉우리 바위가 우뚝우뚝

나그네 뿌린 눈물로 언제나 젖어 있네

월남리로 고개 돌려 월출산을 보지 말게

봉우리 봉우리마다 어쩌면 그리도 도봉산 같아


현대에 와서는 영암 출신 국민 가수 하춘화는 월출산에서 달이 뜨는 광경을 '영암아리랑'으로 대중에게 전달했다. "달이 뜬다/ 달이 뜬다/ 영암 고을에/ 둥근 달이 뜬다/ 달이 뜬다/ 달이 뜬다/  둥근 둥근 달이 뜬다/ 월출산 천왕봉에 보름달이 뜬다." 저자는 고향에서 보는 달은 유달리 더 둥글고 더 붉그스레하게 느낀 적이 있다. 그 둥근 달에는 어머니의 인자하신 얼굴도 들어있고 막내 아들의 웃는 모습도 담고 있다. 월출산에서 달이 뜨고 지는 것을 보고 자란 하춘화만큼 월출산의 둥근 달에 감정을 실어보낼 가수는 없을 것이다.    


월출산 천황봉의 신령스러운 모습, 그 위로 떠오른 보름달의 자태를 상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찾고 싶은 영산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은 월출산을 보면서 기기묘묘한 암봉이 한 곳에 모여 마치 수석전시장을 방불케 한다고 감탄한다. 매우 적절한 비유이고 절대적으로 동감한다. 저자는 월출산의 기암괴석들이 가로로 펼쳐진 능선줄기가 마치 영암을 강진, 해남의 경계를 이루기 위해 설치해 놓은 에지(edge)를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새벽안개가 낀 날 월출산의 에지를 보노라면 신령스러운 기운이 감돌아 금세 산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묘한 감정이 들어 오래 쳐다볼 수가 없을 정도다. (새벽에 운전하면서 연무로 가린 월출산을 자세히 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런 산을 영산(靈山)이라고 하던가. 영암(靈岩)의 한자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지만 영암의 마을에 가면 '기'(氣) 찬 마을이라는 단어를 많이 접하게 된다. 군청의 캐릭터도 기찬이(Gichani), 기순이(Gisuni)다.


신령스러운 월출산의 기를 받는 영암에 명촌이 있고 그 명촌에서 많은 인걸들이 배출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영산 월출산이 품고 있는 군서면에 위치한 구림마을이 바로 그런 마을이다. 구림 마을은 전남 나주 노안 금안동과 전북 정읍시 칠보면 원촌마을과 함께 호남 3대 명촌으로 꼽히는데 역사와 전통으로 보면 가장 오래되었다.


조선 후기의 지리서  택리지(擇里志)에는 “월출산 남쪽에는 월남 마을이 있고 서쪽에는 구림이라는 큰 마을이 있는데, 둘 다 신라 때부터 명촌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구림 마을의 입지는 영암군에 있는 월출산의 주지봉에서 흘러내린 두 줄기의 낮은 구릉이 마을을 감싸 안고 있는데, 예로부터 ‘두 마리의 용이 품은 마을’이라 하여 명당 중의 명당이라 하였다. 구림 마을은 열두 개의 크고 작은 자연촌으로 구성되어 되었는데, 각 마을은 동성동본의 성씨들이 정착하여 동족 마을을 형성하였다. 자작일촌(自作一村 )이다.


구림마을에는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정도로 인물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두 사람만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구림마을 성기동(聖基洞)에는 백제시대 일본 아스카 문화의 시조로 알려진 왕인(王仁) 박사의 탄생지가 있다. 왕인은 일본에 학문(천자문)과 생활도구(젓가락과 숟가락, 도기 등)를 전파하고 일본 왕의 스승이 되었다. 고려 태조의 탄생을 예언한 풍수지리의 대가 ‘도선국사’도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구림(鳩林)’은 통일신라의 명승 도선국가의 탄생 설화와 관련된다.


통일 신라 말엽, "성기동의 한 처녀가 겨울에 우물로 빨래를 하러 나왔다가 파란 오이가 물 위에 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건져서 먹었다. 몇 달 후 처녀의 배가 아기를 밴 것처럼 점점 불러왔다. 열 달이 되자 처녀는 우람하고 잘생긴 아들을 낳았다. 처녀의 부모는 처녀가 아기를 낳은 것이 부끄러워 아기를 국사봉(國師峰) 갈대밭에 버렸다. 며칠이 지나 대숲에 가 보니, 비둘기와 수리가 날아와서 아이를 보호하고 있었다. 그 아이가 성장하여 스님이 되었는데, 이름이 도선(道詵, 827~898)이다”라는 이야기가 속설에 전하여 오는데, 그 일이 있고 나서 마을의 지명으로 비둘기 구(鳩), 수풀 림(林)을 써서 구림이라 부르게 되었다. 지금도 처녀가 낳은 아이를 버렸던 국사암(國師巖)이라 부르는 바위가 있다. 도선에 대한 설화 또는 전설은 그의 비범함을 설명하는 이야기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역사는 통일신라 말기의 고승 도선을 풍수지리의 대가로 평가하고 있다. 도선은 이른바 '비보풍수'(裨補風水)의 개념을 정립하였다고 한다. 비보는 글자 뜻대로 결함이나 부족함을 채워 보완하는 것이다. 자연적 여건이나 환경의 흉(凶)한 부분을 인위적으로 보완하여 길(吉)한 여건을 만드는 것이다. 비보풍수를 대중화시킨 도선국사이야말로 수천 년에 걸쳐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저자는 지금까지 호남 3대 명촌을 직접 방문하여 다양한 관점에서 '이 마을이 무엇 때문에 명촌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고 주민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문헌 자료를 찾아보고 풍수지리적인 측면에서 현지 산을 올라가 보았다. 사실, 풍수지리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3대 명촌이 입지한 산에 올라서면 주변 경관이 탁 트여 눈이 시원하고 뒤에는 산을 배경으로 하고 앞에는 냇물이 흘렀다. 저자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유심하게 관찰한 것은 명촌의 기본 조건, 즉 마을의 역사와 문화, 입지, 인물 등을 두루 갖춰지만 오늘날 명촌의 정신을 어떻게 계승하고 있느냐이다. 수성이 창업보다 어려운 법이다.


영암 구림마을 역시 두 가지 점에서 명촌의 맥을 잇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첫째, 마을 의사결정을 위한 결사체로서 대동계를 운영하였다. 자작일촌의 마을 주민들이 결사체를 유지하면서 민주적인 의사결정시스템을 통해 마을의 대소사를 처리했다. 대동계는 “계원을 정할 때도 재산이 아니라 인품과 주민들의 평판과 같은 기준에 따른다”며 “주요 안건에 대해서는 바둑알로 찬반을 가리는 등 민주적 비밀투표를 수백 년 동안 고수해오고 있다”라고 한다. 마을 단위에서 꽃 피운 협치 모델이다. 둘째, 전통문화를  현대적으로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예산을 확보하고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마을 정자와 고택 등을 정비하고 문화마을로 지정해 황토로 마을 담장과 골목길을 정비하였다. 또한 왕인축제를 비롯해 지역의 상징성, 역사성, 정체성을 활용한 전통문화 마을 만들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지역의 전통과 문화유산을 결합한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2006년 한국내셔널 트러스트 보전대상지 시민공모전에서 ‘잘 가꾼 자연, 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주민들이 합심하여 전통과 현대가 살아 숨 쉬는 현대의 명촌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저출산고령화와 산업구조의 변화가 본격화되면서 지방 소멸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일정 기준의 인구가 있어야 정상적인 일상생활과 경제활동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인구감소는 심각한 국가적인 재난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호남 3대 명촌이라 불리는 마을들의 역사와 문화, 입지조건, 배출된 대표적인 인물 등에 대해 살펴보았지만, 호남에 명촌이 어디 세 군데뿐이겠는가 싶다. 더 중요한 것은 과거 명촌의 역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고 명촌의 역사적 전통과 문화를 어떻게 현대적으로 계승, 발전시키는 것이다. 누구나 살고 싶어 하는 오늘의 명촌이 내일에는 떠나고 싶은 기피촌이 될 수도 있다. 현재 거주하는 마을 주민이 어떤 의식을 가지고 어떻게 만들어가느냐에 따라 명촌이 생성되기도 하고 소멸되기도 한다. 지방소멸시대라는 빨간 경고등이 켜진 현재, 지역마다 자연이 살아있고 역사와 문화가 배어 있고 삶의 수준이 높은 명촌이 많이 생겨 귀농, 귀촌이 활발해져 마을이 소멸되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가져본다.



구림지편찬위원회. (2006). 비둘기 숲에 깃든 공동체 호남명촌 구림. 리북.

추명희. (2002). "역사적 인물을 이용한 지역의 상징성과 정체성 형성 전략-영암 구림리의 도기문화마을 만들기를 사례로-". 한국역사지리학회지 8권 3호.

위클리 공감. (2010).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 탐방로] 정약용의 남도 유뱃길>. 3월 26일.

<풍수지리의 대가 도선국사>. <호남의 명촌, 구림 마을>. 디지털영암문화대전

영암군청 홈페이지  https://www.yeonga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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