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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May 11. 2023

학습예찬

인간은 학습동물이다.

요즘 지방자치단체 평생학습관에서는 지역 학습동아리를 대상으로 시 짓기, 그림 그리기 등 문예백일장을 열어 시상을 하고 성인학습자들을 격려한다. 관(官)에서 학습자의 노력에 대한 인정은 물론 성과를 확인하는 자리다. 가끔 늦깎이 학습자들의 백일장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할 때가 있다. 출품작들은 대부분 70대 이상 할머니들이 한글을 배운 뒤에 쓴 글이 대부분이다. (지역 평생학습관에서 운영하는 문해교육프로그램에는 대부분이 할머니들이 참여하는데, 이는 전통사회에서 여성의 교육받을 기회가 남성보다 적은 결과라고 생각한다.) 글을 깨치고 문맹에서 벗어나 누군가에 글을 쓸 때의 그 감정은 얼마나 복받치겠는가. 할머니가 이미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에게 쓴 편지글을 소개한다. "영감. 제가 글을 배워서 이렇게 당신에게 글을 쓰게 됩니다. 당신이 있을 때 글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이제는 은행에서 돈도 찾을 수 있고 손주들이 보낸 편지도 읽을 수 있어요. 저도 곧 갈 테니까 조금만 참고 계세요..." 저자는 이런 글을 읽으면 감정이입이 되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누가 봐도 감성을 울리는 내용이다. 글을 늦게 배운 것에 대한 원망 섞인 할머니의 글도 있다. "여보, 살았을 때에 왜 저에게 글을 가르쳐 주지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눈봉사로 한평생을 살다 복지관에서 글을 배우니 이렇게 좋은 데 말이에요. 당신이 살아생전에 글을 알았다면 당신에게 편지도 자주 썼을 텐데..." 


매년 2월이 되면 7, 80세 늦깎이 만학도들의 중고등학교 졸업식 소식이 들려온다. 인간극장의 주인공들이다. 81세 할머니가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한글을 잘 모르던 내가 한 자 한 자 읽고 쓰게 되며 세상이 달라졌다. 지금도 책가방 속에 늘 영어 단어장과 한문책을 가지고 다니며 공부를 하는데 앞으로도 매일 도전하며 살 것이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저자와 가깝게 지내는 지인의 모친(95세)은 신안 우이도에서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지만, 목포에 사는 아들이 보내준 셜록 홈스 시리즈, 이광수의 무정, 유정 등 문학작품 등을 애독하고 계신다. 


배움의 문호는 중등교육뿐 아니라 고등교육에도 활짝 열려있다. 사이버대학에서도 고등교육의 기회를 놓친 만학도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한다. 전쟁으로 공부를 중도포기해야 했던 사람들, 큰 아들 또는 큰 딸이라는 이유로 대학 진학의 기회를 동생들에게 양보하였거나, 학비가 없어 취업을 하는 바람에 대학 진학을 포기했던 사람들이 배움의 한(恨)을 품고 살다 대학의 문을 두드린다. 요즘엔 고령사회를 맞이하여 자아실현을 위한 기회를 갖기 위해서도 다시 대학에 입학하는 경우가 많다. 과거에는 5, 60대에 은퇴한 뒤 1, 20년을 살면 평균 기대수명이었지만, 지금은 3, 40년을 더 살게 되니 학교로 돌아와 인생의 기회를 다시 찾는 것이다. 그야말로 현대인들은 한창 배우는 과정에 있는 청소년이든 이미 학교를 마친 기성세대든 간에 배우지 않으면 삶의 의미가 무색해지는 학습사회에 살고 있다.     


일본에서 다독(多讀)으로 유명한 다치반나 다카시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은 알려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인간 존재의 근본을 만드는 것은 바로 독서이다”라고 말했다. 우리말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설파했던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독서는 인간을 완전하게 만들고, 토론은 인간을 부드럽게 만들고, 글쓰기는 인간을 정확하게 만든다"라고 했다. 알려는 것은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고 인간은 독서를 통해 완전한 인간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남을 가르치는 선생은 남보다 먼저 책을 읽는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남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먼저 독서하고 그 책에 담긴 의미를 완전히 소화시켜 제대로 전달해야 한다. 저자의 책상과 가방 속에는 항상 읽어야 할 책들이 있다. 물론 맛만 보는 책도 있고, 삼키기 위한 책도 있으며, 씹고 완전히 소화시키기 위한 책도 있다. 먼저 읽고 깨우치려고 인간적인 안달을 한다. 간혹 전철에서 책장을 펴놓은 채 자는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되는데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일찍이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인간은 학습 동물이다”라고 명명했다. 공자도 논어의 학이편에서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말하면서 배움과 익힘의 즐거움에 대해 강조했다. 인간을 학습동물로 정의(定義) 내린 것은 탁월한 인간에 대한 성찰이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대를 '학습사회'(learning society)라고 한다. 학습동물인 인간이 사는 사회를 학습사회로 규정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물론 칸트가 학습동물이라고 할 때와 현대사회와는 시대적 환경이 많이 다르다. 저자는 학습을 여행으로 비유하고 학습하는 학교나 학원과 같은 교육기관을 학습정원(learning garden)으로 비유한다. 여행의 과정은 당장은 피곤하고 귀찮은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행의 진가는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발휘된다. 마치 시간이 지날수록 묵은 김치의 맛처럼 여행의 의미가 점점 커지게 된다. 학습도 마찬가지다. 학습의 과정은 힘들고 지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가 지적 영양소가 된다. 


저자는 인간이 학습동물로서 학습을 하는 의미를 말할 때는 지금부터 160여 년 전 영국 이튼 스쿨의 윌리암 코리(William J. Cory) 교장의 연설을 인용한다.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은 지식의 습득이라기보다는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기 위한 노력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어느 정도의 지식을 습득하고 기억하는 것은 사실 평균적 능력으로도 가능합니다. 여러분은 많은 것을 잊어버려도 시간을 낭비했다고 후회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식은 잃어버렸어도 적어도 그 그림자(shadow of lost knowledge)는 남아서 여러분이 그릇된 신념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줄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예(技藝)와 습관을 몸에 익히기 위해 공부하는 것입니다. 관심을 기울이는 습관, 표현하는 기법, 무엇인가 주목해야 하는 것을 보는 순간 새로운 것에 지성을 접근시키는 기술, 다른 사람의 사상에 곧 빠져들어 가는 기술, 비난이나 반박을 받아들이는 습관, 찬성과 반대를 적절한 용어로 표명하는 기술, 미세한 점도 정확하게 관찰하는 습관, 주어진 시간 내에 가능한 일을 해내는 습관, 식별력, 정신적 용기 및 침착성 등을 몸에 익히기 위해 공부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 자신을 인식하기 위해서 이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교사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학습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왜 학습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 것 같다. 코리는 학습자의 자세와 학습의 목적을 명확하게 제시한다. 무엇보다 '학습자가 배웠던 것을 잊어버려도 시간을 낭비했다고 후회할 필요는 없다. 지식은 잃어버려도 그 그림자가 그릇된 신념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주는 수호천사가 될 것이다'라는 말은 학습사회에서 학습자에게 주는 금과옥조가 아닐 수 없다. 성인학습자들은 저자에게 이렇게 하소연을 하곤 한다. "교수님, 책을 덮으면 머리가 하얘집니다. 하나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나이 들어 공부하는 만학도는 자신의 인지능력을 시험할 필요는 없다. 기억력 감소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겠는가. 지식의 그림자와 함께 하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이 시간에도 문해학교나 사이버대학에서 알고자 하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에 충실하며 완전한 인간을 향해 주경야독하는 학습자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한국인의 교육열은 세계적이며 유대인의 교육열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다. 고령사회는 곧 학습사회로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오늘도 학습여행을 즐기는 그들이야말로 학습예찬의 주인공들이다.



Rosovsky, Henry. (1990). The University. New York, NY: W. W. Norton & Company. 이형행 옮김. (1996). 대학, 갈등과 선택. 서울: 삼성경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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