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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Jul 10. 2023

사람이나 식물에게도 필요한 말

'북'돋우다

농촌에 살면서 텃밭을 가꾸는 재미가 쏠쏠하다. 직접 밭고랑을 만들고 씨를 뿌린 후 새싹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설렘 반 걱정 반이다. 싹이 제대로 나올까 하는 걱정을 하지만 어떤 싹이 어떤 형태로 나올까 하는 설렘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파종을 마친 농부가 매일 아침저녁으로 논밭에 나가 작물(作物)의 상태를 확인하는 심정을 알 것 같다. 


논밭에 뿌린 씨앗이 발아하여 싹이 나오는 것은 마치 산모가 출산을 한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부모가 생명이 태어난 뒤 본격적으로 양육하는데 모든 에너지를 쏟는 것처럼 농부 역시 발아한 새싹을 어떻게 잘 가꿀 것인가에 모든 정성을 쏟는다. 부모가 갓 태어난 아이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하고 필요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처럼, 논밭의 작물에게도 동일한 원리를 필요로 한다. 


식물의 뿌리를 싸고 있는 흙을 '북'이라고 한다. 땅에 뿌리를 내린 식물이 온전히 성장하기 위해서는 흙의 힘을 돋아주어야 하는데 여기에서 '북돋아 주다'라는 말이 유래한다. 북돋아 주는 행위는 식물의 키에 맞춰 그에 맞는 흙을 보충하는 것이다. 한자식 표현으로는 '배토(培土)'다. 이렇게 하면 잡초를 없애고 배수를 돕고 지온(地溫)을 상승시켜 뿌리의 발달을 좋게 하는 효과가 있다. 탐스러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풀은 뽑아주고 흙은 북돋아 준다'라는 말이 생긴 이유다. 물론 지나치게 많은 흙을 보충하는 것은 오히려 식물에게 해가 될 터이니 경계해야 할 것이다.


재배(栽培)는 '심을 재'와 '북돋울 배'의 합성어로 식물을 재배하는 것은 심고 북돋우는 행위가 동시에 일어난다는 뜻이다. 식물을 심는 것만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흙을 싸 덮어서 가꾸어야 비로소 재배라는 말이 성립한다. 학습(學習)이 '배울 학'과 '익힐 습'의 합성어로 학습은 배움과 익힘 작용이 동시에 일어났을 때 진정한 의미의 학습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세상이 온통 배워야 할 것으로 가득 차있다. 이러니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진지하고 겸허한 평생학습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요즘처럼 '북돋아 주다'라는 말이 귓가에 와닿는 적이 없다. 텃밭에 심은 감자와 대파는 흙을 북돋아준 만큼 키가 자라고 줄기는 굵고 탄탄해졌다. '북돋우다'라는 단어는 '사람의 기운이나 정신을 북돋우다'와 같이 사람을 대상으로만 사용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사람만을 생각하는 편협하고 아둔한 생각을 깨친 것은 불과 몇 개월 전이었다. '북돋우다'는 사람의 용기를 북돋워 주고 의욕을 북돋워 주다에서 처럼 식물을 재배할 때나 사람의 힘을 고취시킬 때 사용한다. 저자는 '북'을 '복'으로 알아듣고 '복돋아 준다'로 잘못 사용하기도 했다.


'북돋우다'라는 단어의 어원과 의미를 알고 난 뒤에 텃밭에 심은 대파 뿌리에 적당량의 흙을 북돋아 주었다. 대파는 흙의 기운을 받아 탄실하게 자라날 것이다. 특히 여름철 강풍을 동반한 폭우에도 끄떡없이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농촌 출신에 어깨너머로 스치듯 배운 농사지식을 고집하면 농사를 망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아예 처음부터 모른다고 인정하고 제대로 배운 것만 못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수십 년 동안 농촌에 삶의 터전을 두고 농사를 짓는 농부를 보면 감탄과 동시에 존경심이 저절로 생긴다. 프로농부의 논밭은 다르다. 프로농부가 재배하는 논밭은 시각적으로도 보기 좋고 다양한 종류의 작물들이 제자리에서 제대로 존재감을 나타낸다. 작물의 위치가 질서 정연하고 과장법을 쓰면 작물이 신명 나고 즐거워 보인다. 신명 나고 즐거운 작물은 때가 되면 풍성하고 탐스러운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사필귀정이다. 


농부가 파종을 하고 싹을 돌보고 잡초를 제거하고 지지대를 세워주고 하는 일련의 과정에는 보이지 않은 자연의 이치에 대한 지식과 과학적 원리를 내포하고 있다. 자연의 법칙과 농법을 절묘하게 조화시켜 실천하는 농부는 자연과학 분야의 과학자다. 저자는 금년 여름 과학으로서 농사의 원리 중 하나인 '북돋우다'를 체득하였다. 그리고 '북돋우다'는 식물만이 아니라 사람에게도 똑같이 필요한 말이라는 것도 알았다. 우리 사회에서도 북돋아 주는 말과 행동이 많으면 좋겠다. 더불어 공동체를 위한 기본 원리이니 말이다. 그러면서 나의 '북'을 돋아주는 것도 잊지 않도록 하자. 자기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끼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멘토(mentor)'라는 말을 흔히 쓴다. 멘티에게 도움을 주는 조언자, 상담자, 지도자라는 뜻이다. '멘토'는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이오니아해 이타케섬의 왕 오딧세우스(Odysseus)가 트로이 전쟁에 출전하면서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인 멘토에게 아들 텔레마코스의 교육을 맡기고 나갔다. 멘토는 그 아들을 선생처럼, 친구처럼, 부모처럼 정성껏 키웠다고 한다. 오딧세우스가 전쟁이 끝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아들이 훌륭하게 성장한 것을 보았다. 오딧세우스는 친구에게 고위직 자리를 제안하지만 친구는 자신의 할 일을 다했다며 홀연히 떠난다.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이다. 멘토는 물질적인 보상이나 눈에 보이는 명예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멘토는 멘티를 위해 헌신하고 그의 성공을 돕는 것이다. 맑고 향기로운 인간관계다. 


사람은 저절로 혼자되지 않는 법이다. 누구나 멘토가 있기 마련이다. 또 자신이 누군가의 멘토일 수도 있다. 그 멘토가 부모가 될 수도 있고, 친구나 직장의 상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의시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북돋아 주는 것이다. '그 누군가'에는 사람만이 아니라 동물이나 식물도 포함한다. 우리말 '북돋아 주는 사람'이야 말로 멘토의 개념에 어울리는 소중한 말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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