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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Sep 26. 2023

비굴했던 권세가 2

청년 위안스카이와 조선

중국인 원세개와 위안스카이(1859~1916). 중국은 한 사람의 이름을 놓고 다르게 부른다. 물론 기준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중국어를 표기할 때의 기준은 신해혁명이다. 신해혁명의 이전 인물은 우리말 발음으로 적고, 이후 인물은 중국어 원음으로 표기한다. 원세개(袁世凱)의 중국식 이름은 위안스카이다. 저자는 조선 역사를 공부하면서 청년 원세개가 조선 반도를 짓밟고 다닌 것에 대해 분개한 적이 있었다. 물론 중국의 속국으로 전락한 조선의 나약함이 젊은 장교의 무소부지의 전횡을 불러왔지만 말이다.


위안스카이가 어떻게 그의 권력을 휘둘렀던가. 그의 등장을 다루기 전에 당시 조선의 정세를 살펴보기로 하자. 1882년 7월 구식군대가 민비(명성황후) 척족 정권의 부패에 대해 항거했다. 임오군란이다. 군란의 발단은 무위영 소속 군병들에게 양이 절반밖에 안 되고 쌀겨와 모래가 섞인 군료를 지급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당시는 관리에게 봉급으로 쌀을 주었다. 이를 봉미(俸米)라고 한다.) 군납비리다. 소요가 일어나자 관할 부서인 선혜청 당상 겸 병조판서 민겸호는 주동자를 혹독하게 고문한 후 처형했다. 해도 너무 했다. 이럴 경우를 적반하장도 유분수라고 하던가.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이 사태를 진정시켜도 모자랄 판에 주동자를 처형했다. 대규모 폭동으로 발전한 것은 예측가능한 일이었다. 고종은 그동안 권력에서 물러나있던 대원군에게 사태수습을 맡겼고 대원군은 8년 만에 권좌에 복귀했다. 그러면서 군란을 내부의 힘으로 수습하기 어렵게 되자 민 씨 척족의 조정은 청국에 진압군 파견을 요청했다.


청국은 군란으로 조선에 출병하여 조선에 대한 내정과 외교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해 종주권(宗主權)을 강화할 기회로 삼았다. 중국 본토에서 아편전쟁(1차 1840년, 2차 1856년) 등으로 서양 제국에 철저히 난도질당하고 있던 청국은 이번 기회에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실히 하려고 했다. 청국은 조선 지배에 장애가 되는 흥선대원군을 그가 권좌에 복귀한 지 33일 만에 중국으로 납치했다. 청은 군란으로 조선과 일본의 관계가 틀어져 무력충돌이라도 일어나면 한양이 일본군 수중에 떨어질 것을 우려했다. 이런 우려를 불식하기 위해서는 일본을 강경하게 배척하는 대원군을 제거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이런 가운데 국내 정치세력은 청국의 도움으로 재집권에 성공한 민 씨 척족정권과 타협하면서 조선을 개혁하려는 온건개화파와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같은 개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급진개화파로 갈라졌다. 급진 개화파 민 씨 척족 정권 온건 개화파 친청(親淸) 정책에 반발했다. 그들은 청과의 사대관계를 끊고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서양의 기술과 제도를 수용하자고 주장했다. 국내 정치세력은 친청과 친일의 대리전 성격이 농후했지만 친청 세력이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1884년 청국은 프랑스와 전쟁에 돌입했다.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놓고 프랑스와 벌인 청불전쟁(1884~1885)이다. 이 전쟁의 여파로 청은 임오군란 이후 주둔하던 청군 3천 명 중 1천5백 명을 조선에서 철수했다. 이 기회를 틈타 일본은 급진개화파에게 군사적 지원을 약속하고 친일내각을 수립하려고 했다. 급진개화파는 일본을 끌어들여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정변은 3일 만에 청군에 의해 제압됐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외세를 끌어들인 후유증은 감당하기 어려운 법이다. 정변의 실패로 청의 내정간섭이 심화되었으며 친청 보수 세력이 집권하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조선의 역사에 대해서는 한국사에서 다룬 이야기다. 한국사를 공부하면서 조선말 위정자들의 모습을 보면 책을 던져버리고 싶을 정도로 좌절과 안타까움이 교차하는 것은 저자만이 아닐 것이다. 이쯤 해서 위안스카이를 등장시키자.


청은 임오군란의 배후에 흥선대원군이 있다고 단정 짓고 그를 납치해 갔다. 납치의 주역은 스물세 살 위안스카이(당시 오장경 육군 제독의 비서장)었다. 또한 위안스카이는 갑신정변(1884년), 즉 일본의 힘을 빌려 개혁을 시도하려는 정변을 제압했다. 그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총독’이 됐다. 이홍장 등 청 정권의 고위관료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위안스카이는 조선의 자주적 근대화를 철저히 봉쇄하며 식민지 수준의 내정간섭을 했다. 1882년부터 1894년까지 무려 12년 동안이다. 어떤 사람은 위안스카이를 인간 거머리라고 한다. 조선에 빨대를 대고 피를 빨았다.


조선은 서양국가 중에 미국과 최초로 수교관계를 체결했다. 1882년 5월 22일이다. 조선이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 열강에 포위된 채 자주적인 근대화를 추진할 수 없는 처지에 내몰리게 되었을 때 미국이란 신흥강대국에 의지하여 난국을 돌파할 생각이었다. 결과적으로 조선과 미국과의 수교조약은 고종의 미국에 대한 짝사랑이었고 미국의 배신으로 끝났다. 조미수교조약에는 ‘영약삼단(另約三端)’이라는 특별한 조건을 달았다. 주권국가로서는 치욕적인 조건이었다. ① 조선 공사는 주재국에 도착하면 먼저 청국 공사를 찾아와 그의 안내로 주재국 외무성에 간다 ② 회의나 연회석상에서 조선 공사는 청국 공사의 밑에 자리한다 ③ 조선 공사는 중대 사건이 있을 때 반드시 청국 공사와 미리 협의한다. 청은 조미수교조약문에 조선이 청의 속국임을 삽입하려고 했지만 미국의 강력한 반대로 좌절되었다. 영약삼단은 속국이라는 명시적인 표현을 대신하고자 하는 청의 속셈을 드러냈다. 조선은 영약삼단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수교했다. 청, 러시아, 일본 등 주변 열강의 간섭과 위협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짚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사실 미국과의 수교 제의를 한 당사자는 청이었다. 청은 러시아의 남하정책과 한반도에서 일본의 세력 확장을 미국을 개입시켜 저지하려고 했다. 친청연미론(親淸聯美論)이다. 그러면서 조미조약에 조선이 청의 속방이라는 조항을 삽입하려고 했지만 좌절됐다. 대신 조선과 체결한 조청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에 조선이 청국의 ‘속국’ 임을 반영시켰다. 1885년 청은 조선이 속국이라는 이유로 일반적인 외교관 명칭을 쓰지 않고 ‘주찰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紮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라는 직책으로 위안스카이를 조선에 상주시켰다. 조선의 정치, 외교, 경제, 통상 등이 20대의 청년 위안스카이 수중에 들어갔다. 위안스카이는 궁중에 가마를 타고 들어갈 수 없는 궁중의례를 일부러 무시하고 왕의 앞까지 가마를 타고 드나들었다. 위안스카이는 '원대인(遠大人)', '감국대신(監國大臣)', '조선의 왕'으로 비유될 만큼 조선의 내정·외교에 적극 간섭하였다. 감국대신, 즉 조선을 관리감독하는 관리다. 위안스카이는 3년 기한으로 부임해 왔으나 세 차례나 연임되었다.


위안스카이의 내정간섭은 간섭을 넘어섰다. 이런 일도 있었다. 고종 27년(1890년) 봄, 고종을 수렴청정했던 조대비가 세상을 떠나자 청은 칙사를 파견하여 문상하겠다고 알려왔다. 그러나 조선은 경비부담의 곤란함을 들어 칙사파견 중지를 요청하였지만, 청은 칙사의 경비를 부담하더라고 강행하겠다고 하였다. 문상을 오지 말라고 해도 오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청의 칙사가 오면 국왕이 칙사를 영접해야 하는 절차가 있다. 어디 절차뿐이겠는가. 칙사를 대접하기 위해서는 백성의 고혈을 짜내야 한다. 고종은 칙사 영접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위안스카이는 국왕의 출영이 없으면 입성, 조상할 수 없다고 위협했다. 청의 뜻대로 됐다.


청은 위안스카이의 덕에 조선 경제에서 청이 차지하는 비중이 일본보다 컸다. 청보다 훨씬 더 일찍 조선에 진출한 일본을 능가할 지경에 이르렀고 이는 일본이 청일전쟁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 사유가 됐다. 임오군란 이후 조선은 자주적인 개혁을 할 기회를 맞이했는데 위안스카이를 조선에 주둔시킨 청의 간섭과 책동으로 잃어버렸다(이양자, 2029). 조선은 청과 위안스카이라는 장애물을 만나 변화의 골든타임을 놓쳐버렸다. 조선을 망국의 길로 이끌었던 대표적인 외국인을 꼽으라면 청국의 위안스카이와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일 것이다.


위안스카이는 청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청은 아편전쟁, 청불전쟁, 청일전쟁(1894~1895)에서 연달아 패배하면서 중화의 위상이 크게 흔들렸다. 청은 광서제(1871~1908)에 이르러 변법(變法)을 국시로 정하고 부국강병을 모색하는 개혁정책을 추진하고자 했다. 중국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무술변법(戊戌變法) 또는 변법자강운동(變法自强運動)이다광서제는  중앙관제를 개혁하여 관직을 서양식으로 바꾸고, 인재양성을 위해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신학교를 설립하고, 근대식 군대 체제를 수립하고 상공업을 진흥하는 한편 철도를 부설하고 조선소를 설립하는 등 교육, 경제, 법 등 사회 전반에 걸친 대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중국 역사에서 사치와 부패의 아이콘으로 평가받는 서태후가 가로막았다. 서태후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는 변법운동이 중화를 오랑캐로 타락시키는 술책이라고 판단했다. 서태후가 변법을 무산시키려고 계획했을 때 광서제는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는 위안스카이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위안스카이는 그 사실을 서태후 측에 밀고하였다. 위안스카이는 군부의 중심으로 본래 개혁파에 가담했지만, 등을 돌려 보수파에 가담하면서 개혁은 끝이 났다. 이 사건으로 광세제는 유폐되고 변법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2008년 11월, 중국합동조사단은 광서제의 사인을 독살로 결론냈다. 서태후에 반기를 들며 개혁군주 역할을 한 광서제의 죽음이 독살일지 모른다는 말이 있었지만, 법의학적으로 독살 사실이 확인됐다.) 개혁군주 광서제는 위안스카이의 배신으로 개혁의 실패는 물론 황제 자신도 서태후의 미움을 받아 장기간 연금 생활을 한 비운의 황제다


위안스카이는 조선에 머문 10여 년 동안 세 명의 조선 여인을 취해 7남 8녀를 둘 정도로 군주에 못지않은 향락을 누렸다. 위안스카이는 후한 시대 삼국지에 등장하는 원술의 후예다. 둘의 공통점은 난세의 실력자로서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가 실패했다. 원술은 우연히 얻게 된 옥새를 보관하고 있다는 이유로 스스로 황제를 참칭 하다 조조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위안스카이 또한 즉위 88일 만에 황제 즉위를 취소했다. 황제에서 물러나고 예전의 직위, 즉 대총통 복귀를 선언했다. 황제 자리가 아니면 말고 식이었다. 나라를 자영업 경영하듯이 했다. 위안스카이는 대총통 복귀 선언 후 일족 외에는 아무도 자신을 따르지 않자 충격을 받아 급사하고 말았다. 권력을 참칭하고 비굴하게 권력을 행사하는 권력자의 말로는 비슷하다.



김원모. (2002). 한미 외교관계 100년사. 서울: 철학과 현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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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균. (2021). 중앙선데이. [박보균의 현장 속으로] 위안스카이 협박, 조선 근대화의 황금 기회 봉쇄하라 …한국 외교의 반면교사. 2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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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 (壬午軍亂)-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임오군란-우리역사넷

용의 전쟁 1885. (2017).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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