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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Nov 15. 2023

은행나무 단상

부모님을 지켜낸 수호천사

늦가을에서 초겨울 사이 도심의 가로수 은행나무 잎들이 인도(人道)를 노랗게 물들인다. 은행알의 냄새는 고약해도 노란 이파리의 자태를 보면 용서가 된다. 지독한 냄새에도 불구하고 은행나무를 가로수로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은행나무는 병충해가 거의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하고, 무엇보다 공해에 강한 점 등이 높은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 은행나무는 도심 가로수로 적격이지만 특유의 냄새 때문에 벌목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2011년 국립산림과학원이 은행나무 잎을 이용해 암수를 식별하는 ‘DNA 성감별법’을 개발하여 1년생 이하의 어린 은행나무의 암, 수를 정확히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 은행나무 가로수는 은행알이 열리지 않은 수나무로 채워지게 될 것이다.  


은행잎과 은행알이 떨어지는 요즘 인도에는 오리발 모양의 은행잎들이 수북하게 쌓여 마치 노랑 카펫을 깔아놓은 듯하다. 어쩌다 은행알을 밟으면 우두둑 소리가 난다. 신발은 은행알 특유의 냄새로 진동한다. 매년 치르는 의식인양 사람들이 은행알을 밟지 않기 위해 지그재그로 걷는 모습을 보면 불편하게 보이지만 정답게 느껴진다.  


고향 집을 둘러싼 담장 안쪽에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있었다. 할아버지 때부터 건재했으니 얼추 100년은 넘었으리라. 고인이 되신 아버지는 땅에 떨어진 은행을 비닐포대에 넣어두었다 껍질을 충분히 삭힌 후에 포대 표면을 발로 비벼 껍질을 벗겨냈다. 껍질이 벗겨진 은행을 씻어 말린 후 불에 구워 익히면 옅은 푸른색을 띤 알의 모습을 드러낸다. 부친은 은행알을 7개 이상 먹지 않도록 했다. 은행알은 독성을 함유해 익혀 먹더라도 적정량을 초과하면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하셨다. 동의보감을 가까이하신 아버지인지라 신뢰가 갔다. 우리나라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는 익힌 은행알의 적정 기준을 권장한다. 성인은 하루 10개 이하, 어린이는 하루 3개 이하다.


은행알은 열매일까? 아니다. 은행알은 열매가 아니라 종자, 즉 씨앗이다. 은행나무는 겉씨식물이기 때문에 씨방이 없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은행알은 과학적으로는 종자의 일부이나 일상에서는 열매라고 부른다. 은행나무를 부르는 이름도 흥미롭다. 잎 모양이 오리발을 닮았다고 하여 압각수(鴨脚樹)로 부른다. 더 흥미로운 이름은 공손수(公孫樹)다. 생장이 느려 열매를 맺으려면 오랜 세월이 필요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즉 공(公)은 남을 높이는 말이고, 손(孫)은 자손을, 수(樹)는 살아 있는 나무를 의미한다. 은행나무가 자라 열매를 맺으려면 30년 이상의 수령(樹齡)이 되어야 하니 후대에 가서야 수확의 결실을 볼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은행나무를 심는 사람의 마음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 가 있어야 한다.


은행나무가 지구상에 처음 나타난 것은 약 3억 5000만 년 전이라고 한다. 지구의 나이가 45억 살쯤되고 호모 사피엔스는 약 20만 년 동안 지구에 존재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은행나무의 존재는 엄청나다. 은행나무를 '살아있는 화석'으로 부르는 이유다. 은행나무 생존의 역사가 곧 지구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은행나무는 생존력이 탁월한 장수식물이고 인간에게 친숙한 나무이다 보니, 민속 설화와 전설에 소재로 등장하곤 한다. 영화 <은행나무 침대>(1996년)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소재로 한 판타지 장르영화다. 사랑하는 연인이 은행나무로 환생하여 두 그루가 서로 곁에 있으면서 오랜 세월을 함께 한다. 은행나무는 두 사람의 얼굴을 새긴 침대로 거듭난다. 여자가 은행나무 침대로 환생하여 남자를 기다린다. 기다리는 세월이 170년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은 은행나무의 이미지를 변치 않은 사랑으로 대비하여 극적인 효과를 연출했다. 이 영화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전생신드롬을 일으킬 정도였다.


저자 역시 은행나무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2012년 8월, 초대형 태풍(볼라벤)이 한반도를 할퀴고 갔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가옥은 침수되고 강풍에 나무들이 뿌리 채 뽑혔다. 한 세기 이상 고향집을 지켜오던 은행나무도 버텨내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길이가 족히 40m나 된 은행나무는 노부모가 거처하는 방을 간신히 비켜나 텃밭에 누웠다. 은행나무가 오랜 세월 동고동락해 온 부모님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까 싶었다. 그 광경을 본 저자는 한편의 시(詩)로 쓰러진 은행나무를 애잔하게 여기고, 노부모를 지켜 준 것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담았다.     


<은행나무>


고향 집 은행나무 100년 넘게 살았구나.

숱한 역경과 굴곡 이겨낸 거목(巨木)

집안의 희로애락을 함께 한 산증인

뿌리 뽑힌 웅덩이가 거대한 분화구 같다.


산화(散華)할 자리를 미리 맞혀놓은 듯

빈터에 누워

늙은 부모 다치지 않게 하였으니

그 마음 고맙구나.


은행나무여

사라짐을 너무 서러워 마라.

네가 서 있었던 자리엔 널 닮은 생명이 솟아날 터이니

소멸과 생성은 같은 뿌리가 아니겠느냐!


저자는 은행나무가 고향집과 노부모를 지켜주었다고 믿고 있다. 은행나무가 쓰러진 그 해 추석 다음 날 어머니도 계단에서 넘어져 다음 해에 소천하셨다. 은행나무는 고향 집의 상징이었고 정신적인 수호천사였다. 은행알이 아무리 독한 냄새를 풍겨도 고향 집과 부모님을 지켜주었던 듬직한 은행나무는 저자에겐 특별한 감회를 선사한다. 신발에 밟힌 은행알의 우두둑 소리가 정겨운 이유다.


더 주목하는 점은 은행나무와 인간의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지극히 상호의존적이다. 은행알은 주로 인간에 의해 번식이 가능하다. 인간이 아니면 은행알이 떨어진 그 자리에서 번식되다 소멸되고 말 것이다. 일반적으로 식물의 열매는 바람이나 곤충, 동물에 의해 다른 지역으로 이동, 번식할 수 있지만, 은행알은 그 특유의 고약한 냄새 때문에 곤충이나 동물이 접근하지 않는다. 바람조차 무거운 은행알을 옮길 수 없다. 전생에 인간이 은행나무였는지, 은행나무가 인간이었는지 모르는 일이다.


올 가을 유달리 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자주 보는 책에 넣어두었다. 책을 펼칠 때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고향의 향수, 부모님 거처를 피해 쓰러진 은행나무, 은행알을 굽던 아버지의 얼굴 그리고 일곱 개의 은행알을 세어 주시던 어머니의 손이 파노라마처럼 튀어나올 것이다.



올리버, 닐. (2020). 잠자는 죽음을 깨워 길을 물었다. 이진옥 옮김. 파주: 월북.

최성우. (2019). 사이언스타임스. 3억 5천만 년을 살아온 ‘은행나무’. 4월 5일.

<은행나무 침대>. (1996).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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