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뻘밭에 비유하면 그 밭에는 수많은 영웅과 위인들이 등장하는 광활한 공간이 된다. 역사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에서 양규 장군(楊規, 미상~1011)을 그 뻘밭에서 캐냈다. 저자는 양규 장군을 처음 접했다. 부끄러웠다. 양규 장군을 통해 우리 역사의 자부심을 고양시킬 수 있었고, 그를 통해 역사의 뻘에 감춰진 인물들을 눈에 불을 켜고 찾는 작업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인문학이 인간의 흔적이나 동선을 좇는 작업이라고 할 때 역사적 인물이 남긴 그 궤적이야말로 가장 인문적이지 않겠는가.
양규 장군. 그는 거란(중국 역사에서 요나라)의 정복자 성종(聖宗)이 40만 대군을 지휘하며 고려를 침략(1010년)했을 때 종횡무진으로 활약한 영웅이다. 당시 양규 장군은 서북면 도순검사(都巡檢使)로 흥화진(興化鎭,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군으로 조선시대에는 백마산성으로 부름)의 수성을 책임지고 있던 장수였다. 도순검사는 '왕이 특별한 임무를 주어 지방에 임시로 보내던 관리'이다. 고려군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적을 맞아 결사항전으로 흥화진성을 지켜냈다. 양규 장군의 지휘 하에 군민이 일치 단결했기 때문이다. 사즉생 생즉사(死卽生 生卽死)이다. 숫자로만 보면 거란군과 고려군은 130대 1이 넘는다. 전쟁은 숫자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했다. 거란은 40만 대군으로 3천 명의 고려군이 지키고 있는 흥화진성을 공략하지 못해 고려점령 전략에 엄청난 차질을 빚게 되었다.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성종은 군사를 나눠 20만은 흥화진성 인근에 배치하고 20만은 개경으로 남진하기로 결정한다. 거란군은 고려 국왕 현종이 전라도 나주까지 피난을 떠난 뒤에 개경에 무혈입성했다. 거란은 현종을 생포하여 무릎을 굽히고 고려를 속국으로 만들려는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거란의 성종은 고려의 총사령관 강조(康兆)의 편지를 위조하여 흥화진성의 양규에게 보내 항복하라고 설득하기까지 했다. 양규는 사신에게 “우리는 왕명을 받고 여기에 왔지, 강조의 명령을 받고 와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잘라 말하면서 항복하지 않았다.
강조에 대해 잠깐 언급하자. 강조는 2차 거란의 침략이 있기 전에는 흥화진 도순검사로 있었다. 깅조는 목종을 폐하고 현종을 옹립하는 정변을 일으켰는데 거란은 바로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고려를 침략했다. 정변 이후 고려의 최고권력자가 된 강조는 30만 고려군의 총사령관으로 거란군과 대치하다 포로가 되어 참형되었다. 강조의 전략을 보면 임진왜란 당시 신립 장군을 보는 듯하다. 두 장수 모두 험준한 산악지형을 이용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신립 장군은 지세가 험준한 조령에 진을 치자는 참모들의 건의를 묵살하고 충주 벌판(탄금대)에서 일본군과 대회전을 치렀는데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 완패하고 말았다. (물론, 신립 장군이 조령에서 일본군을 맞아 싸웠더라도 당시 조선군의 무기와 훈련으로 보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강조는 초반의 소규모 전투에서는 몇 번 승리를 거둬 거란군을 무시하고 방심하다 그만 대패하였다. 강조는 거란군의 기습에도 불구하고 태연 작약하게 막사에서 바둑을 두며 여유를 부리면서 했던 말이다. "입 안 음식처럼 적군도 적은 것은 좋지 않다. 많이 들어오게 내버려두어라."
전쟁에서 상대를 과소평가하거나 지형이나 지세를 충분히 살리지 못할 경우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징계(懲毖,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대비함)로서 재상 류성룡(1542~1607)과 장군 신립(1546~1592) 사이에 오간 대화를 기록한다. 1592년 4월 1일에 류성룡이 그를 방문한 신립 장군과 나눈 대화 내용이다. 임진란 발발 12일 전의 이야기다.
류성룡: "조만간 변고가 생기면 공께서 맡아서 해결해주셔야 하는데, 공이 보시기에 지금 적들의 형세는 어떻습니까?"
신립: "걱정할 것 없습니다."
류성룡: 그렇지 않습니다. 전에는 왜인들이 창과 칼 같은 짧은 무기만 믿고 싸웠지만, 지금은 조총처럼 좋은 무기를 가지고 있으니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신립: 비록 조총이 있다 한들 어떻게 모두 적중시키겠습니까?"
류성룡: "나라가 태평한 지가 오래되어 군사들이 나약해져 있으니, 만일 위급한 일이 생기면 적에 대항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몇 년이 지나 군사 일에 익숙해지면 사태를 수습할 수 있겠지만 전쟁 초기에는 알 수 없으니, 그 점이 매우 우려됩니다."(류성룡, 징비록에서 재인용)
조선 중기 전설적인 명장으로 그 용맹을 떨쳤던 신립 장군이 일본군을 얼마나 평가절하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신립 장군은 일본군이 비록 조총이라는 신식무기를 지니고 있어도 조선군을 모두 적중할 수가 없으니 마음 놓아도 된다는 식이다. 신립 장군의 일본군에 대해 갖고 있던 정보 수준과 상대를 무시하는 듯한 말투에서 적어도 육지에서 임진년 전쟁은 패배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20만의 군사를 이끌고 개경을 접수했던 거란군은 양규 장군의 악몽에 시달렸다. 양규 장군은 유격전을 펼치며 거란군을 괴롭혔다. 양규는 곽주(郭州)에 주둔하고 있던 6천 거란 수비대를 공격하여 성을 탈환하고 성 안에 있던 고려인 7천 명을 통주로 이주시켰다. 곽주성의 탈환은 거란군에 엄청난 타격이 되었다. 거란군은 고려 성들을 공략하지 못한 채 유일하게 곽주성과 안주성 두 곳을 뺏아 후방 보급기지로 삼고 있었는데 곽주 성을 빼앗긴 것이다. 전쟁 수행 중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면 전쟁수행을 계획대로 할 수 없다. 북부 지방의 혹한도 무서웠다. 현종을 생포하려면 나주까지 뒤쫓아야 하는데 감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거란은 철군을 결정하였다.
양규 장군은 철군하는 거란군이 쉽게 돌아가도록 놔두지 않았다. 쉽게 돌아가면 다시 고려를 쉽게 침략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양규 장군은 유격전을 펼쳐 수천의 거란군의 목을 베고 포로로 잡힌 3만여 명의 고려민을 구출했다. 양규 장군은 단순히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에 목적을 두지 않고 할 수만 있다면 고려민을 구출하기 위해 전력투구했다. 무인으로서 그의 뜨거운 동포애와 조국애를 동시에 엿볼 수 있다.
양규 장군이 흥화진성을 방어한 것은 단순히 하나의 성을 지켜냈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양규 장군이 흥화진성을 고수함으로써 거란군의 남진 병력을 분산시키고 그들의 후방을 교란할 수 있었고 고려군이 반격할 여건을 마련했다. 만약 흥화진성이 무너지고 거란군 40만 명이 그대로 남진하였다면 고려의 역사는 또 달라졌을지 모른다. 고려-거란전쟁에서는 거란의 1차 침략 때는 서희, 3차 침략 때는 강감찬에 집중하다 보니 2차 침략 때의 양규 장군과 같은 명장이 그 뒤에 가려졌던 것이다. 혹자는 '조선에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면, 고려에는 양규 장군이 있었다'라고 말한다.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배로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것처럼, 양규 장군은 3천의 병사로 40만 거란의 대군을 막아냈으니 말이다.
나주까지 피난을 가야 했던 고려 국왕 현종도 양규 장군의 전공을 잊지 않았다. 고려사에 실린 양규 장군의 전공에 대한 포상 기록이다.
"국왕은 전공으로 양규 장군에게 공부상서(工部尙書)를 추증하였고, 처 홍씨(洪氏)에게는 곡식을 지급하였으며, 아들 양대춘(楊帶春)은 교서랑(校書郞)으로 임명하였다. 왕은 손수 교서를 지어, 홍 씨에게 하사하여 이르기를, 그대의 남편은 재능이 장군으로서의 지략을 갖추었고, 겸하여 정치의 방법도 알고 있었다. 항상 송죽(松筠)과 같은 절개를 지키다가 끝까지 나라에 충성을 다하였고, 그 충정은 비길 데가 없을 정도로 밤낮으로 헌신하였다. 지난번 북쪽 국경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중군(中軍)에서 용맹을 떨치며 군사들을 지휘하니, 그 위세로 전쟁에서 이겼고, 원수들을 추격하여 사로잡아 있는 힘을 다해 나라의 강역을 안정시켰다. 한 번 칼을 뽑으면 만인이 다투어 도망가고, 6 균(鈞)의〈활〉을 당기면 모든 군대가 항복하였으니, 이로써 성(城)과 진(鎭)이 보존될 수 있었으며, 군사들의 마음은 더욱 굳건해져 여러 차례 승리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전사하였도다. 뛰어난 공을 항상 기억하여 이미 훈작과 관직을 올렸으나, 다시 전공에 보답할 생각이 간절하므로 더욱 넉넉히 베풀고자 한다. 해마다 그대에게 벼 100석을 하사하되, 평생토록 할 것이다."
현대 국가에서도 전몰장병의 헌신과 희생에 대한 감사와 함께 그들에게 다양한 지원을 하고 있지만, 현종이 양규 장군 부인에게 직접 쓴 글을 보면서 고려 시대에 전쟁에서 순국한 장병과 그 유족에 대해 어떤 예우를 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현종의 양규 장군에 대한 추모와 예우는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드라마에는 주연과 조연의 역할이 정해져 있지만, 역사의 무대에서 주연과 조연이 어디 있겠는가 싶다. 역사의 시공간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주연이라고 생각한다. 주연보다 더 빛난 조연이라는 말이 괜히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역사에도 역사의 뻘밭에 숨겨진 진주와 같은 영웅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역사 드라마가 기록의 파편을 토대로 상상력을 발휘하지만, 시청자들에게 우리 역사의 자긍심을 일깨워준 영웅들을 역사의 무대에 등장시킨 공로는 자못 크다. 역사의 무대 주연 뒤에 가려진 조연들을 부단히 찾아 발굴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무다. 양규 장군의 흥화진성 사수가 있었기에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도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조 대에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가 양규 장군을 무성묘(武成廟)에 모셔 배향하도록 상소를 올렸고 왕도 허락하였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무성묘는 뛰어난 문신을 배향하는 문묘(文廟)와 같이 무신(武臣)의 명장을 배향하는 사당을 말한다. 양규 장군 외에 무성묘에 배향하는 역대 왕조의 무인들은 신라의 김유신, 고구려의 을지문덕, 고려의 유금필, 강감찬, 윤관, 조충, 김취려, 김경손, 박서, 김방경, 안우, 김득배, 이방실, 최영, 정지 그리고 조선의 하경복과 최윤덕이었다. 조선 왕조에서도 양규 장군의 진가를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 어느 한쪽에만 조명을 비추는 것이 아닌가, 역사의 뻘밭에 묻혀 있는 인물들을 발굴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에 대해 깊이 성찰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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