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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Dec 11. 2023

조선의 이순신, 영국의 넬슨

두 영웅의 결, 같은 듯하지만 다른 점

저자는 여행을 좋아하는데 뱃멀미가 심한 탓에 배를 이용한 여행을 하지 못해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천성적으로 멀미를 잘 하지만 뱃멀미는 더 심하다. 한 번은 부산 내륙에서 오륙도에 가고 돌아오는 시간에 겪었던 뱃멀미를 생각하면 지금도 끔찍하다. 심한 구토가 위경련으로 악화되어 병원응급실에서 치료를 받고 함께 여행했던 가족들에게도 민폐를 끼쳤다. 뱃멀미를 하지 않으면 가보고 싶은 곳이 많고 인문학 적 아이디어를 발굴하는데도 많은 도움이 될터인데 하는 아쉬움이 크다. 뱃멀미는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은 초연결의 글로벌 세상'에서 저자의 발목을 잡는 아킬레스건이 되었다. 어디 뱃멀미뿐이던가. 대형버스를 오래 타거나 승용차에서 책을 보아도 멀미를 한다. 이상한 점은 비행기나 기차와 같이 비교적 직선으로 다니는 교통편에서는 멀미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작부터 멀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이유가 있어서다. 바로 영국의 호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 1758~1805) 제독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넬슨 제독은배를 탈 때마다 심한 멀미로 시달렸다고 한다. 그는 만성적인 뱃멀미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신경통과 우울증으로 이어졌다. 평생 배를 타야 하는 해군 장교가 승선할 때마다 뱃멀미를 한다는 것은 천성적인 체질 탓으로 돌려야 하겠지만 그의 아킬레스건이 되었을 것이다. 넬슨 제독은 열두 살부터 배를 타기 시작했으니 평생 시달렸을 뱃멀미를 생각하면 인간적인 동질감까지 느끼게 된다. 뱃멀미를 해본 사람은 안다.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불편하여 차라리 지옥도 이보다 나을 것이라 생각할 정도다. 멀미만 멈출 수 있다면 바다로 뛰어들고 싶을 심정이다. 저자는 평소 우리나라의 이순신 장군에 비유되는 넬슨 제독에 대한 관심이 컸는데 인간적인 동질감까지 있다 보니 더욱 관심이 컸다.


이순신 장군(1545~1598)과 넬슨 제독이 걸어온 길과 그들이 남긴 족적을 보면 닮은 점도 많지만 그 결은 다르다. 무엇보다 이순신 장군과 넬슨 제독 사이에는 2백 년이 넘는 시차가 있다. 그러나 두 영웅이 해군 지휘관으로서 조국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했다는 점에서는 시공간을 초월한다. 우선 몇 가지의 유사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두 사람은 자신의 조국이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했을 때 조국을 구한 영웅들이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1592~1598) 당시 23전 23승으로 조선의 바다를 지키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넬슨 제독은 트라팔가 해전(1805년)에서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함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둬 나폴레옹의 정복 야망을 꺾으면서 영국을 지켜냈다. 세계 해전사에는 길이 빛나는 대첩들이 있다.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과 넬슨 제독의 트라팔가 대첩도 그 대열에 들어간다.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이 세계 해전사의 3대 대첩에 들어가느냐, 4대 대첩에 들어가느냐를 놓고 논란이 있는 것으로 알지만, 이는 유럽 역사에 편향된 사가들의 기록일 뿐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다. 한산대첩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여 승리했는가를 안다면 유럽인들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전쟁의 승패야말로 병사의 숫자나 함선의 숫자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더욱이나 이순신 장군은 명량해전(1597년)에서 불과 13척의 배로 133척의 일본군을 궤멸시켰지 않았던가. 조선의 함선은 일본군 함선에 비해 무려 10분의 1에 불과했다. 넬슨 제독은 트라팔가해전에서 영국  함대 27척으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 33척을 무찔렀다.  


둘째, 두 사람은 해상전투 중 적군이 쏜 총탄에 맞았고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최고 지휘관으로서 품격을 잃지 않았던 영웅이었다. 노량해전(1598년)에서 적군이 쏜 총탄에 맞은 이순신 장군은 "싸움이 급하니 내 죽음을 아직 알리지 말라(戰方急 愼勿言我死)"라고 했다. 트라팔가 해전에서 적군이 쏜 총탄에 맞은 넬슨 제독 역시 “손수건으로 나의 얼굴을 가려라”라고 했다. 전쟁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최고 지휘관의 부상이나 죽음이 알려지면 부하들의 사기와 전황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이순신 장군과 넬슨 제독은 죽음으로써 전쟁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순신 장군은 일본과의 7년 전쟁에 마침표를 찍었고, 넬슨 제독은 무려 126년간 계속돼 온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크고 작은 해전에 종지부를 찍었다. 총상을 입은 넬슨은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적선 몇 척을 나포했는지 물었다. 부하가 15척을 나포했다고 대답하자 “난 20척을 예상했는데…”라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전투가 끝나고 확인한 결과 나포한 적선은 21척이었다. 전신(戰神)답다. 전쟁의 신은 영웅의 주검을 원하고 두 영웅은 전설이 되었다.


셋째, 두 사람은 그 어떤 국민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영웅의 신화를 창조하고 후대의 전설이 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동상은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한복판인 광화군 광장에 세워졌다. 이순신 장군의 동상은 기단 10.5m, 동상 6.5m의 총 17m 높이다. 이순신 장군상은 광화문이 세종로, 태평로가 뚫려 있어 일본의 기운이 강하게 들어오니 이를 막을 필요가 있다는 풍수지리 학자들의 의견을 들어 광화문 사거리로 위치가 결정됐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저자에겐 이순신 장군 동상은 그가 지켜내고 산화했던 남쪽 바다를 바라보며 조국의 안위를 걱정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넬슨 제독의 동상은 영국의 수도 런던의 트라팔가 광장 한가운데에 세워졌다. 넬슨 제독의 동상은 55미터 기둥 위에 5m 크기다. 이렇게 높은 곳에 동상을 세운 이유는 “내가 죽어서도 프랑스를 감시할 수 있도록 높은 곳에 올려 달라’는 넬슨 제독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넬슨 제독의 동상은 전투에서 한쪽 눈과 팔을 잃었던 모습 그대로 재현돼 있다. 광화문 광장에 우뚝 선 이순신 장군 동상이 호시탐탐 한반도를 노리는 일본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 넬슨 제독의 동상은 한쪽 눈과 한쪽 팔이 없는 모습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경계를 이루는 도버해협을 바라본다. 트라팔가 광장을 보면서 한 가지 아쉬운 생각을 피할 수 없다. 영국은 넬슨 제독이 트라팔가 해전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광장 이름을 아예 트라팔가로 명명했다. 넬슨 제독의 동상은 곧 전승기념탑이 되었다. 우리도 발상의 전환이 필요할 듯싶다. 왜 처음부터 현재의 광화문 광장을 노량광장이나 한산광장 등 이순신 장군과 직접적으로 연관되고 그의 조국애를 상징할 수 있는 이름으로 짓지 않았느냐 하는 점이다.


넷째, 두 사람은 해전에서 새로운 전법을 고안하여 상대의 허를 찔렀다.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에서 학익진(鶴翼陳) 전법으로 함선의 열세를 일거에 만회했다. 이순신 장군은 견내량에서 일본군을 유인하여 한산도에서 조선 수군의 장점인 함포를 이용하여 적을 궤멸시켰다. 일본군에게 해저 괴물 '복카이센'으로 불린 거북선의 성능을 개선하여 적군을 압도했다.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은 일본군 전선 47척을 침몰시키고, 12척을 나포했다. 조선 수군은 단 한 척의 전선도 피해를 입지 않은 완벽한 승리였다. 구한말 고종 황제의 미국인 고문 호머 헐버트는 "한산대첩은 조선의 살라미스 해전이다. 이 해전이야말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에 사형 선고를 내린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살라미스 해전(Battle of Salamis)은 기원전 480년 그리스 연합군과 페르시아군의 전쟁으로 그리스 연합군은 200여 척의 페르시아 함선을 침몰시키거나 나포했다.


넬슨 제독의 전법도 혁신적이었다. 당시 해전의 전투방식은 단종진(單從陣), 즉 모든 군함이 일렬횡대로 길게 늘어서서 대포가 장착된 측면으로 마주 선 적함을 향해 정지된 상태에서 포격을 가하는 방식이었다. 넬슨 제독은 이 전통적인 전투방식을 깼다. 넬슨 제독은 함대 32척을 16척씩 두 줄로 세워 화살처럼 적진을 뚫고 들어가는 작전을 펼쳤다. 이 전법을 '넬슨 터치'라고 부르는데, 이 작전은 일종의 사선진(斜線陣)으로 마치 거북선이 일본군 함선을 종횡무진 격파하며 전진하는 것을 연상시킨다. 넬슨 제독의 함선은 16척씩 두 줄로 세워서 일렬횡대로 늘어선 적 함대의 중간을 뚫고 들어가 선단을 삼등분하였다.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은 영국 전함이 일으킨 파도 탓에 흔들리는 군함에서 적함을 잘 조준하지 못했다. 반면 영국 해군의 능숙한 수병들은 이런 경우를 대비해 평소 파도에 흔들리는 군함에서 포를 조준해 발사하는 훈련을 해왔다. 전투 결과는 놀라웠다.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 소속 23척의 군함 중 20척이 격침되거나 나포됐다. 영국 함대의 손실은 한 대도 없었다.


다섯째, 두 사람은 부하들의 잠재력을 최대한 이끌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갖췄다. 부하로부터 존경받는 리더야말로 부하의 자발적 헌신과 솔선수범을 이끌어낼 수 있는 법이다.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을 제작할 때도 나대용 등 부하들의 의견을 충분히 경청한 뒤 수용 여부를 판단하고 책임과 권한을 명확히 구분했다. 넬슨 제독 역시 전투 전에 부하들과 치밀하게 계획하고 전투 중에도 상황에 따라 유연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계급을 불문하고 그들의 잠재력을 발휘하게 했다. 두 영웅은 전쟁에서의 승리는 부하들의 지휘관에 대한 신뢰와 그들의 헌신과 희생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순신 장군과 넬슨 제독을 똑같은 잣대를 들이대고 평가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다. 객관적인 사실을 놓고 보면 두 영웅을 비교, 평가한다는 것은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이순신 장군과 넬슨 제독이 각각 처했던 정치적, 군사적 환경은 엄청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은 원래 말을 타고 활과 장검을 휘두르는 육군 장교 출신이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18개월 전에 전라수군좌수사로 부임하면서 수군과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부임할 때는 조정에서 수군폐지론이 비등하여 수군의 존재감이 떨어졌던 시기였고 남아있는 전함은 고작 12척에 불과했다. 어디 그뿐인가. 이순신 장군은 중앙정치의 당파 싸움의 희생양이 되었다. 조국에 충성하고 일본군이 그렇게 두려워하는 이순신 장군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하기는커녕 모함과 조작으로 끌어내리려고 했다. 더구나 이순신 장군은 중앙 정부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환경에서 현지 백성들의 지원을 받거나 자급자족의 형태로 군수품과 군량을 자체 조달해야 했다. 한마디로 조선에서는 이순신 장군에게 제대로 된 지원조차 하지 않으면서 그가 죽기로 각오하고 싸워 쟁취해 낸 승리조차도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다.


넬슨 제독의 경우는 이순신 장군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넬슨 제독은 12살부터 삼촌이 지휘하는 함선에서 수병 생활을 해온 해군 출신이다. 무엇보다 넬슨 제독은 영국 정부로부터 군함, 군량비 등 전쟁 수행에 필수적인 보급과 병참 지원을 받았다. 넬슨 제독은 중앙정치의 당파 싸움이나 병참 등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오로지 전쟁에 집중할 수가 있었다. 트라팔라 해전의 승리는 영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과 지지, 그리고 넬슨 제독의 전략과 조국애가 빚어낸 대첩이었다.


어떤 국가든지 그 국가를 대표하는 영웅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관점에 따라서는 여러 영웅 중에서 한 명을 선택해야 할 때가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이순신 장군과 영국의 넬슨 제독이야말로 우리나라를 대표하고, 영국을 대표하는 영웅으로서 납득하지 하지 못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공교롭게도 두 영웅이 남긴 공적과 족적이 너무나 유사하여 이를 비교해 보는 것도 유의미한 작업이었다고 생각한다. 영국에서 넬슨 제독을 국가적 영웅으로 예우하는 모습은 매우 입체적이고 상징적인 인물로 크게 부각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나라도 이순신 장군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영웅으로서 그 가치를 지금 보다 더 부각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반가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해군사관학교 해군 장교 정복 단추에는 거북선이 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후예로서 거북선의 이념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모자와 허리띠에도 거북선이 새겨져 있다. 해군 장교는 몸에 12척의 거북선을 거느리고 다니는 셈이다. "아직도 신에게는 12척의 배가 있습니다"라고 선조에게 상소하면서 조선수군을 부활시켜 일본군과 싸우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내비쳤던 이순신 장군의 얼과 혼을 품고 있다.

  

저자에게 우리나라의 이순신 장군과 영국의 넬슨 제독을 단순 비교하라고 하면 1초도 생각하지 않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순신 장군과 넬슨 장군의 공통점은 탁월한 전략가로 조국을 위기에 구한 영웅이다. 그러나 두 영웅의 차이점이 있다면 이순신 장군은 불굴의 용기로 숱한 역경과 고난을 극복한 기술혁신가이다." 서구 역사가들이나 저술가들이 아무리 이순신 장군을 높이 평가해도 서구중심의 역사관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넬슨 제독에 대한 평가가 후할 수밖에 없다.


저자는 이순신 장군에 대한 가장 정확한 평가는 이순신 장군과 직접 싸웠던 당사자의 평가라고 생각한다. 일본 통일을 이룩하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총애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장군의 이순신 장군에 대한 평가다.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모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 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하고 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이다." 일본 해군 전략연구가 가와다 고오(川田功)는 "이순신에게 넬슨과 같은 거국적인 지원과 그만큼의 풍부한 무기와 함선을 주었다면, 우리 일본은 하루아침에 점령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대단히 실례인 줄 알지만, 한국인들은 이순신 장군을 성웅(聖雄)이라고 떠받들기만 할 뿐 그분이 진정으로 얼마나 위대한 분인가 하는 것은 우리 일본인보다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과 대적했던 일본 장군과 전략가의 평가다. 부끄럽지만 맞는 말이다. 


넬슨 제독을 탁월한 전략가로 군신(軍神)으로 추앙하는 영국인의 이순신 장군에 대한 영국인의 평가는 어떨까 싶다. 영국의 해군 제독을 역임했던 알렉산더 발라드(1862~1948)는 "이순신은 전략적 상황을 널리 파악하고 비상한 해군전술로 전쟁의 유일한 참 정신, 불굴의 공격원칙에 의해 늘 고무된 통솔원칙을 겸비하였다. 맹렬한 그의 공격은 절대 맹목적 모험이 아니었다. 영국인에게 있어 넬슨 제독과 견줄 수 있는 해군 제독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그렇게 인정을 받아야 할 인물이 있다면 그는 패배라는 것을 전혀 모른 채 전투 중에 전사한 동양의 해군 사령관 이순신일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영국 해군 제독이 넬슨 제독을 이순신 장군과 동급으로 평가한 것이다. 동급의 평가는 곧 이순신 장군을 우위에 놓는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저자도 팔이 안으로 굽은 것인가.


우리는 말로만 이순신을 존경하진 않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무엇보다 놓치지 말아야 할 포인트는 매년 이순신 장군 탄생일에 맞춰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후손들이 아산 현충사과 통영 충렬사에 참배를 온다고 한다. 우리 민족의 성웅 이순신 장군 앞에서는 국경을 초월하여 머리를 조아리게 된다. 역사는 냉혹하고 반복되는 관성의 법칙이 있다. 난세에 영웅이 출현한다고 하지만, 우리 시대에 이순신 장군과 같은 영웅이 있다면 그가가진 탁월한 리더십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주자.



램버트, 앤드루. (2004). 넬슨. 박아람 옮김. 서울: 생각의 나무.

발라드, 알렉산더. 해양이 일본 정치사에 미친 영향

헐버트, 호머. (1906). 대한제국 멸망사. 신복룡 옮김. 서울: 집문당.

석영달. (2016). "1920년대 초 영국 해군 장교의 일본사 서술 속 이순신 읽기 - 조지 알렉산더 밸러드의 『해양이 일본 정치사에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 한일관계사연구, 통권 55호.

권석하. (2023). 주간조선. ‘작은 거인’ 넬슨을 영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이유. 7월 14일.

김재중. (2021). 국민일보. [세계의 광장을 가다] ⑨ 런던 트라팔가 광장. 2월 17일.

정재민, 박나영. (2021). 신동아. [해전의 승부수 군함⑧] '유럽의 명량대첩' 트라팔가 해전 그 서막

해운의 시대, 국가 사활 걸고 해군 양성한 영국. 3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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