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가 스코틀랜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고려대학교 박춘호(朴椿浩, 1930∼ 2008) 교수님 덕분이다. 박 교수님은 1996년 국제해양법재판소(ITLOS)의 초대 재판관으로 선출되는 등 국제해양법 전문가로 이름을 날렸다. 그의 자전적 수필《지리산골에서 세계의 바다에서》는 불우한 환경을 극복하고 꿈을 향해 도전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담았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대학에서 공부한 박 교수님은 우리나라에서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국제해양법 분야를 개척하고 대학에서 후학들을 양성했다. 학문 세계에서 석학(碩學)이란 명예로운 칭호를 받으려면 박 교수님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저자는 생전의 박 교수님을 몇 번 뵙고 말씀을 듣는 기회가 있었는데 너무나 소탈하고 배려심이 많은 분이셨다. 그런 인간성은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한 시기를 보내면서 다른 사람의 입장을 먼저 헤아리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이 인격으로 승화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박 교수님과 그의 책을 통해 스코틀랜드와 에든버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브리튼 섬의 북쪽에 위치한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와 함께 '그레이트브리튼 북아일랜드 연합왕국(UK)'의 일원이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인들은 영국의 대다수 국민과 자신들의 뿌리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역사적, 문화적 배경과 기질도 다르다고 본다. 스코틀랜드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데는 이유가 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시기에 잉글랜드와 웨일스는 로마의 지배를 받았지만, 스코틀랜드는 로마의 지배를 거부하고 격렬하게 저항하면서 독립을 지켜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로마인들조차도 점령을 포기할 정도로 강인한 저항정신을 가졌다. 오죽했으면 로마가 스코틀랜드를 경계로 120여㎞에 달하는 성벽을 쌓았을지 싶다. 로마 황제의 이름을 딴 '하드리아누스 성벽'이다. 중국에 만리장성이 있다면 스코틀랜드에는 하드리아누스 성벽이 있다.
스코틀랜드 왕국은 834년에 성립됐다. 스코틀랜드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잉글랜드는 경제력, 군사력, 인구 등 모든 면에서 우위에 있었는데, 북쪽의 스코틀랜드를 병합하기 위해 끊임 없이 침략 전쟁을 일으켰다. 1296년은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에 나라의 운명을 뺏기느냐를 결정하는 분기점이 되었다. 그때에 스코틀랜드 왕은 알렉산더 3세(King Alexander III)였다. 알렉산더 3세는 잉글랜드의 빈번한 침공을 잘 막아냈지만, 낙마 사고로 급사했다. 불행하게도 그의 후손들도 일찍 죽었다. 유일한 후손은 맏딸이 노르웨이 왕에게 시집가서 낳은 마가릿이란 세살배기 외손녀였다. 스코틀랜드 영주들은 알렉산더 3세의 유일한 혈통인 마가릿을 국왕으로 내세우고 대리인을 통해 섭정통치를 했다. 왕조 시대에는 후계 계승이 안정적으로 이어질 때 지속적으로 국가를 유지할 수 있다.
호시탐탐 스코틀랜드를 병합하려는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 왕국의 왕위계승에 따른 혼란을 틈타 그의 아들 에드워드 2세를 마가릿과 약혼시켰다. 그러나 마가릿이 노르웨이에서 스코틀랜드로 가던 도중에 사망했다. 스코틀랜드 왕가의 정통 혈통이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다. 왕위 계승 내분이 일어났다. 잉글랜드는 존 베일리얼(John Balliol)을 지지했고, 베일리얼이 스코틀랜드 왕위에 올랐다.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 왕을 임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베일리얼은 에드워드 1세를 스코틀랜드 최고 영주로 대우해주기로 약속했다. 사실상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의 속국임을 인정하는 조치였다.
에드워드 1세는 베일리얼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세워놓고 국정에 사사건건 개입하고 영토의 일부를 떼어 갔다. 잉글랜드는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면서 병력을 지원하라고는 요구하기까지 했다. 에드워드 1세의 허수아비가 된 베일리얼은 프랑스왕 필리프 4세와 비밀 동맹을 맺고 잉글랜드 북부를 공격했지만 패전했다. 1296년 베일리얼은 재위 4년만에 폐위되고 런던탑에 유폐되었다.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 왕실의 상징인 스콘석(stone of Scone)을 가져가 사실상 스코틀랜드를 병합시켰다.
스콘석은 단순한 돌이 아니다. 이 돌은 길이 66㎝, 너비 43㎝, 높이 27㎝에 무게 150㎏의 붉은 사암으로, 9세기 초부터 스코틀랜드 국왕의 대관식에 사용됐다. 이 돌에 관한 이야기는 구약 창세기의 야곱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형의 위협을 피해 도망다니던 야곱이 해가 저물어 벧엘이라는 곳에서 잠을 자면서 베개로 삼았던 돌이라고 한다. 그 의미를 알게 되면 기독교 국가에서는 누구나 갖고 싶어하는 성물(聖物)이다. 1296년 잉글랜드 에드워드 1세가 전리품으로 빼앗은 뒤 잉글랜드 국왕의 대관식에 사용되다 1996년에 이르러서야 스코틀랜드로 영구 반환됐다. 다만, 영국 국왕 대관식 때는 다시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가져온다는 조건이었다. 1950년대에 스코틀랜드 민족주의자들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보관된 '스콘석'을 훔친 사건이 발생했다. 범인들은 밝혀졌고, 돌은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이 사건은 스코틀랜드 국민에게 스코틀랜드 분리주의 운동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를 병합했지만, 스코틀랜드인들은 잉글랜드의 식민 통치를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 로마도 스코틀랜드 점령을 포기하지 않았던가. 그때에 스코틀랜드 민중의 영웅 윌리엄 월리스(1270?~1305)가 등장한다. 월리스는 그의 아내를 욕보인 잉글랜드 치안대장을 살해한 이후 산발적인 저항운동을 벌였는데, 1297년 스털링 다리 전투(Battle of Stirling Bridge)에서 압도적인 군사력을 보유한 잉글랜드군을 무찔렀다. 지리적 이점을 이용한 전략과 정신력에서 앞선 대승이었다. 스털링 다리 전투에서 대승을 걷은 후, 스코틀랜드 영주들은 월리스에게 ‘스코틀랜드의 수호자(Guardian of Scotland)'라는 지위를 부여했다. 월리스는 스코틀랜드 군과 민병대의 지휘자로서, 런던탑에 갇힌 베일리얼 국왕의 대리통치자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월리스가 잉글랜드를 상대로 항상 승리한 것은 아니었다. 1298년 월리스는 폴커크 전투(Battle of Falkirk)에서 잉글랜드 군에 참패했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결과로 스코틀랜드 영주들은 월리스에게서 ‘스코틀랜드의 수호자’ 칭호를 박탈하고 잉글랜드 에드워드 1세와 협상을 시도한다.
월리스는 참패 이후 잠적하다 내부고발로 잉글랜드군에 체포됐다. 1305년 잉글랜드는 월리스를 처참하게 죽였다. 잉글랜드는 월리스에게 그의 사지를 밧줄에 묶어 말이 각각 네 방향으로 출발해 네 조각으로 찢어 죽이는 거열형(車裂刑)을 내렸다. 윌리스의 목을 런던 거리에 매달았고, 사지는 스코틀랜드 국민들의 눈에 잘 띄는 곳에 걸어놓았다. 잉글랜드에 반역하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였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일벌백계 전략은 엄청난 역효과를 불러왔다.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의 수호자요 군사지도자였던 월리스를 능지처참(陵遲處斬)의 형벌을 내린 것도 부족하여 시신을 효수(梟壽)한 것은 스코틀랜드인들의 엄청난 분노와 저항의식을 북돋았다.
월리스가 스코틀랜드 국민에게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은, 잉글랜드의 폭정에 맞서 국가를 독립시켜야 겠다는 단호한 의지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약소국인 스코틀랜드가 단합하면 얼마든지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제작된 영화가 멜 깁슨이 감독하고 주연을 맡은 <브레이브 하트>다. (이 영화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였지만, 확인되지 않은 전설이나 야사를 지나치게 미화시켜 각색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월리스 사후 잉글랜드의 스코트랜드에 대한 간섭과 폭정은 계속되었다.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왕위 계승 싸움도 계속되었다. 에드워드 1세는 잉글랜드를 위해 꼭시각시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스코틀랜드 왕으로 세우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오히려 잉글랜드의 통치에 반기를 든 로버트 더 브루스(1274~1329)가 왕이 되었다. 스코틀랜드의 '로버트 1세'다. 로버트 1세를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를 침략했다. 잉글랜드는 막대한 현상금을 걸고 브루스 체포령을 내렸다. 브루스는 스코틀랜드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면서 잉글랜드의 침략을 견뎌냈다. 1314년에는 스코틀랜드가 배넉번(BannockBurn) 전투에서 잉글랜드를 격파하고 대승을 거뒀다. 잉글랜드는 브루스가 스코틀랜드왕이 되고 30년이 지난 뒤에야 왕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1328년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 독립을 보장하는 조약을 체결하며 마무리됐다.
두 나라는 때때로 왕족들끼리 결혼해 동맹 관계를 맺으면서 연합왕국을 이어나갔다. 두 나라 역사에 대반전이 일어났다. 1603년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가 후계자 없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잉글랜드 왕은 혈연 관계에 있던 스코틀랜드 왕이 차지하게 됐다. 그가 바로 제임스 6세(James VI, 1567–1625)다. 제임스 6세는 로버트 1세의 후손이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같은 군주의 통치를 받는 시대가 된 것이다. 1707년 두 나라는 연합법을 제정해 단일 의회를 만들어 마침내 연합왕국으로 새롭게 태어났다.오늘날 영국의 국기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국기를 합한 것이다. 역사의 대단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를 차지하려고 숱한 전쟁을 일으키고,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의 폭정과 식민통치에 맞서 치열한 독립전쟁을 전개하여 독립을 쟁취하였지만, 스코틀랜드 왕이 잉글랜드 왕을 겸하면서 두 나라는 통합됐다.
어떻게 스코틀랜드 왕과 잉글랜드 왕을 겸하는 국왕이 탄생하게 되었을까? 1603년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가 죽었을 때 여왕을 이를 후계자가 없었다. 제임스 6세가 엘리자베스 1세의 종손 자격, 즉 제임스 6세의 증조모이자 외증조모 마거릿이 잉글랜드 왕 헨리 7세의 딸이며 엘리자베스는 헨리 7세의 손녀이기에 제임스는 잉글랜드 왕위계승권을 보유하게 되었다. 스코틀랜드 왕이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게 됐다. 제임스 6세는 잉글랜드에서는 제임스 1세라고 불렸다. 1707년 그레이트브리튼 왕국(Kingdom of Great Britain)으로 통일되어 하나의 국가가 될 때까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한 명의 왕 아래에서 서로 다른 의회와 정부를 운영했다. 역사가들은 이런 왕국을 ‘왕관연합(Union of the Crowns)’ 혹은 동군연합(同君聯合)이라고 불렀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하나의 왕실로 통합될 것이라는 것은, 결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역사다. 이 역사적 무대에는 윌리엄 월리스와 로버트 더 브루스라는 걸출한 영웅이 등장한다. 월리스가 스코틀랜드인들의 자긍심과 저항의식을 북돋았다면, 브루스는 오랜 동안 잉글랜드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이끌면서 독립을 쟁취했다. 저자가 생각할 때, 브루스는 잉글랜드로부터 독립을 위해 월리스와 함께 싸웠지만, 월리스만큼 스코틀랜드 독립에 대한 신념이나 확신이 뚜렷하지 않았던 것 같다. 심지어 브루스는 에드워드 1세에게 충성서약을 할 정도였다. 스코틀랜드의 대표적인 귀족 출신인 로버트 1세는 그가 가졌던 기득권을 지키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던 그가 대다수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의 왕으로 추대되어 독립 전쟁의 구심점으로 잉글랜드와 장기전을 펼쳐 독립을 쟁취했다. 브루스는 풍찬노숙(風餐路宿)에 가까운 생활을 하며 독립 전쟁을 이끌었다. 영화 <아웃로 킹>에서는 스코틀랜드왕 로버트 더 브루스가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면서 어떻게 스코틀랜드인들을 단합시켜 강대국 잉글랜드에 저항하고 독립을 쟁취했는가를 보여준다.
로버트 더 브루스에 관한 책이나 영화에서는 거미와 거미줄이 등장한다. 브루스가 도망자 신세로 동굴에 피신하고 있을 때, 입구에서 거미가 거미집을 짓는데 한 번에 완성하지 못하고 여러 번 실패를 거듭하면서 결국에는 거미집을 완성하는 것을 보았다. 집짓는 선수인 줄 알았던 거미도 한 번에 집을 완성하지 못했다. 브루스는 거미가 숱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목표를 달성하는 것을 보면서 많은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브루스는 거미의 행동을 보면서 동굴에서 동료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쫓기는 신세로 전락해 고난과 역경에 놓여 있는 자신을 깊이 성찰하고 다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을 내던질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때에 따라서는 인간보다 하등 동물로부터 더 깊은 영감과 통찰력을 얻는 수가 있다.
스코틀랜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에든버러가 스코틀랜드 역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알아야 한다. 그만큼 에든버러의 역사는 스코틀랜드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리고 에든버러를 알기 위해서는 에든버러 성 입구 동상으로 서 있는 윌리엄 월리스와 로버트 더 브루스에 대해 알아야 한다. 스코틀랜드인들은 두 사람을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하며, 스코틀랜드의 전설이 되었다.
21세기에도 스코틀랜드가 영국으로부터 분리 독립하려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2014년 스코틀랜드는 영국으로부터 분리 독립하는 것에 대한 주민 투표까지 했는데, 55%가 반대해 독립이 무산됐다. 경제로만 따지면 영국은 스코틀랜드를 품고 있는 큰 집 역할을 했다. 영국의 경제적 힘이 강할 때에 스코틀랜드는 분리 독립의 꿈을 숨죽이고 있다, 영국 경제가 불황을 겪으면 다시 꿈틀거린다. 분리 독립의 발단은 1970년대 북해에서 유전이 발견되면서 현실화됐다. 스코틀랜드가 분리 독립에 성공한다면, 북해 유전은 스코틀랜드의 몫이 된다. 분리독립 뒤 스코틀랜드 몫의 ‘당근’이 있는 셈이다. 또한 브렉시트, 즉 영국이 유럽연합(EU)에서 탈퇴하면서 스코틀랜드는 영국에서 분리 독립하여 독자적으로 EU에 가입하려는 움직임이 강력해졌다.
영화 <007>에서 제임스 본드 역을 맡았던 숀 코네리(Sean Connery, 1930~2020)도 에든버러 출신이다. 그는 2000년에 영국 정부로부터 기사(Knight Bachelor) 작위를 받았다. 2014년 스코틀랜드 분리독립 투표때 독립운동의 열성적인 지지자로 전면에 나서기도 했다. 기사 작위는 영국 왕에게 충성한다는 서약을 하지만, 조국이 분리 독립 여부를 판가름하는 투표에서는 찬성표를 던졌다. 마치 브루스가 에드워드 1세에게 충성서약을 한 뒤 스코틀랜드의 독립 전쟁을 펼쳤던 역사와 데자뷔된다. 에든버러는 스코틀랜드의 브레이브 하트 발원지면서, 오늘날에도 그 역할을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관계는 곧 우리나라와 중국과의 관계로 비유하고 싶다. 특히 왕조 시대에 중국은 우리나라를 속방으로 간주하고 왕과 왕세자의 즉위를 승인하는 절차를 밟게 했으며 온갖 내정에 간섭하려 들었지 않았는가. 특히 우리나라 민족 정신은 스코틀랜드와 매우 유사하다. 우리 민족은 중국에서 비롯된 숱한 전쟁과 침략을 끈질기고 강인한 정신력으로 막아냈다. 그때에 우리 민족은 경제력, 군사력, 인구 등 국력에서 어느 것 하나 중국에 우세한 것이 없었다. 침략자의 압도적인 군사력조차 민족의 저항 정신과 독립 의지를 지배하지 못하는 법이다.
박춘호. (1998).《지리산골에서 세계의 바다에서》. 서울: 문학사상사.
이영석.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지역주의와 지역문제. 한국사회조사연구소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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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브하트. (1995). 영화.
브레이브하트 2. (2019). 영화.
아웃로 킹. (2018).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