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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Sep 23. 2020

화선(畵仙) 장승업 이야기

선배들만 원(園)이에요? 나도 원((園)이에요!

우리나라 17, 8세기는 문예부흥기로 유럽의 르네상스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유럽의 르네상스가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 패러다임이 바뀐 것이라면,  영조와 정조 시대에 꽃이 핀 문예부흥은 중국 중심의 문화 일변도를 벗어나 우리나라 고유의 정체성을 찾고자 노력한 것에 다름 아니다. 예를 들어, 그림에서는 진경산수화가 등장하여 우리나라 산천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그렸다.  중국 사대주의가 얼마나 만연했는지, 그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그림조차도 중국의 산수를 그렸으니 다른 것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문예부흥기에서는 특히 그림으로 재능을 떨친 화가들이 대거 등장한다. 대부분의 미술사 전공자들은 이때 명성을 떨친 대표적인 화가들을 삼재삼원(三齋三園)로 부르는 데 견해를 함께 한다. 삼재(三齋)는 겸재(謙齋) 정선, 현재(玄齋) 심사정, 관아재(觀我齋) 조영석을 말하며, 삼원(三園)은 단원(檀園) 김홍도, 혜원(蕙園) 신윤복, 그리고 오원(吾園) 장승업이다. 미술사가에 따라서는 공재(恭齋) 윤두서를 포함하여 사재로 부르기도 하고 관아재를 빼고 공재를 삼재로 분류하는 사람도 있다.


오원(吾園) 장승업(1843-1897)은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단원과 혜원에 비하면 미술 공부를 하기 위한 환경이 절대적으로 척박했다. 경기도 안산 출신의 단원은 당대 시/서/화의 삼절로 이름을 날린 표암 강세황을 스승으로 모시고 조기 과외를 받았다. 또 스승의 소개로 서울로 이사하여 현재 심사정에게 과외를 받기도 했다. 혜원은 그의 아버지 신한평이 도화서의 전문 직업화가로 영조 대왕의 어진을 그릴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장승업의 경우는 단원과 혜원과는 출신이나 배경이 판이하게 다르다.


장승업은 어려서 부모를 잃은 고아로 수표교 아래에서 거지처럼 떠돌며 살다가 역관 출신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며 하루하루 연명할 정도로 비참한 신세였다. 단원이나 혜원은 훌륭한 스승을 두었거나, 직업화가인 아버지 아래에서 그림 공부의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면, 장승업은 대부분 어깨너머로 배웠거나 명작들을 임모 하면서 그림 공부를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장승업은 한자를 제대로 배우지 못해 작품의 화제는 다른 사람이 써 주곤 했다. 그에 대한 에피소드가 많지만 대개는 '술'과 관련된 이야기로 시작한다. 취명거사(醉暝居士)라는 별호는 그의 예술 창작과 술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말해준다.


 장승업은 천재와 광기 사이를 오가며 힘겹게 살다가 고통스럽게 죽어 간 빈센트 반 고흐와 닮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장승업은 살아 있을 때는 인정을 못 받다가 사후에 명성을 얻었던 고흐와는 달리, 생전이나 사후 모두 '천재 화가'로 크게 이름을 떨쳤다.  장승업의 천재성은 여러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대부분은 그의 그림을 "신이 그린 작품", 즉 신품(神品)이라고 평가하면서 신이 내려와 그린 것 같다고 한다. 그의 예술 세계는 자유분방하고 선이 굵고 거침이 없어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것을 꺼려하고 술이 없으면 붓을 들지 않을 정도였다. 술에 취해서야 신명 나게 붓을 놀리는 천재성과 광기를 넘나드는 불가사의 한 존재였다.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2002년)은 화가 장승업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인데, 이 영화에서도 장승업의 성품을 호방하고 기개가 넘치는 성격의 소유자로 그리고 있다. 


조선 말기의 전설적 화가로 자리매김을 한 장승업은 선배 화가였던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에 대해 도전장을 내민다. 화가 장승업은 "선배들만 원(園)입니까? 나도 원(園)이에요~"  장승업의 호, 오원(吾園)은 이렇게 해서 탄생한다. 어쩌면 엄격한 유교 질서의 신분사회에서 단원이나 혜원과 같은 대선배들이 가진 신분과 배경에 대해서는 콤플렉스를 가질 수 있지만, 실력에서만큼은 선배들에게 뒤떨어지지 않고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자긍심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  


사람은 누구나 닮고 싶은 롤모델이 있다. 오원(吾園)을 만든 것은 그의 대범함과 호연지기이고 그것은 자신이 도달할 목표가 되었다. 그는 "그래! 나도 원(園)이다"라는 기개와 자유분방함으로 선배 화가들을 '법고 해서 창신'했다. 장승업은  전통 화법과 근대 화법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터치로 단원과 혜원을 뛰어넘었을 뿐 아니라 미술사적으로도 조선 회화와 근대 회화의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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