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대 초한대전에서 불세출의 장수로 지략가로 이름을 떨쳤던 한신(韓信)이 천신만고 끝에 파촉의 유방을 찾아갔다. 한신은 장량이 대원수로 추천한다는 증표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일 생각으로 승상 소하(蕭何)를 만났을 때도 증표를 내보이지 않았다. 소하 역시 한신에 대해 들은 바가 있지만 향량과 항우 휘하에서 집극랑(執㦸郞), 즉 창을 들고 장수를 호위하는 하급 무관이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장량이 대원수로 추천했다는 소식은 전연 알지 못한 형편이었다.
소하는 이 야심찬 젊은이를 다방면으로 시험해 보고 그의 능력에 놀랬다. 사람을 볼 줄 아는 소하가 유방에게 한신을 대원수에 천거하지만 유방은 콧방귀를 뀐다. 유방에게 한신은 가난하여 빨래하는 아줌마에게 밥을 빌어먹었던 사람, 거지꼴을 하고 다니며 시정배의 겁박에 그의 가지랑이 사이를 지나가던 겁쟁이, 즉 고사성어 과하지욕(袴下之辱)의 주인공이며 폭군 항우를 위해 일했던 하급관리로 기억에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유방은 소하가 여러 번 한신의 능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추천하는 바람에 연창관(連倉官), 즉 창고지기들을 감독하는 직책을 제수한다. 이 자리도 유방은 소하의 체면을 생각하여 큰 마음먹고 벼슬을 내린 것이었다. 한신에게 이 직책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란 것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한신의 비범함에 놀란 소하는 거듭 유방에게 한신의 능력을 자랑하고 대원수 직책을 제수할 것을 제청한다. 유방은 소하의 간청에 못 이겨 치속도위(治粟都尉), 즉 국가의 식량과 곡물 담당 관리에 임명한다. 유방으로서는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한 것이었다. 한신은 오랜 관행처럼 내려오던 뇌물 상납을 없애고 공평한 양곡정책을 펼쳐 백성들의 불만을 해소하게 되자 백성들은 자진하여 헌납했다. 백성들은 소하를 찾아가 한신을 그 자리에 오래 머물러 있게 부탁할 정도가 되었다. 소하는 다시 유방을 찾아가 한신의 능력을 입에 침이 닿도록 칭찬하면서 대원수 직책을 제수하도록 간청한다. 그러나 유방의 눈에 한신은 겁쟁이이거나 항우를 위해 일한 하급관리로 낙인이 찍혔을 뿐이다.
소하는 거듭된 자신의, 추천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방에게 제나라 경공(景公)과 명재상 안자(晏子)와의 꿈얘기를 하게 된다. 경공은 안자에게 "나는 요사이 꿈자리가 사나워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산에 올라가서는 호랑이를 만난 꿈을 꾸었고, 늪에 들어가서는 뱀을 만난 꿈을 꾸었으니 그게 흉몽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라고 묻는다. 안자는 "호랑이는 산에 사는 짐승이고 뱀은 늪에 사는 동물입니다. 산에 가서 호랑이를 보시고, 늪에서 뱀을 보신 것이 무슨 흉몽이겠습니까. 진실로 나라에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다면, 오직 세 가지의 불상사가 있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세 가지 불상사가 궁금해진 경공이 안자에게 "도대체 나라에 세 가지 불상사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라고 묻는다.
천하의 명재상 안자는 세 가지를 답한다. "첫째는 나라에 어진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임금이 그것을 모르는 것이고, 둘째는 임금이 어진 사람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사람을 등용하지 않는 것이고, 셋째는 임금이 어진 사람임을 알고 그 사람을 등용하더라도 대들보로 써야 할 사람을 서까래로 쓰시는 것입니다."
소하의 이야기를 들은 유방은 그런 인재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소하는 한신이야말로 국가의 대들보임에 틀림없다고 입이 달도록 추켜올리고 대원수 직책 제수를 간청한다. 대원수가 어떤 자리인가? 유방의 마음도 이해가 된다. 한나라의 모든 군사를 움직이는 엄청난 자리가 아니던가. 소하의 끈질긴 노력에도 유방의 마음이 움직이질 않게 되자, 한신은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는 유방에게 실망한 나머지 파촉을 떠나 다시 중원으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 소식을 들은 소하는 한신의 뒤를 쫓아 천신만고 끝에 한신을 다시 만나 데려온다. 소하가 얼마나 급히 한신을 뒤쫓아갔던지 유방에게 미리 알리지도 못했다. 승상 소하가 며칠 보이지 않게 되자 유방은 소하가 자기를 배신하고 도망간 것으로 생각했을 정도였다.
소하는 승상이라는 체면이고 뭐고 할 것 없이 한신을 놓치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유방에게 미리 알리지도 않고 한신을 찾아 나선 것이었다. 그런 정성이 한신을 감동시켰고 한신은 소하를 따라 한나라로 돌아왔다. 소하는 한신이라는 국사무쌍(國士無雙), 즉 그 누구보다 빼어난 인물을 데려온 것이다. 한나라는 한신 이전과 한신 이후로 구분할 정도로 한신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소하는 유방에게 다시 한번 대원수 천거를 간청하지만, 이번에도 유방은 대원수 자리의 막중함을 말하며 거절한다. 소하는 한신에게 이렇게 묻는다. "귀공이 초나라에 있을 때 범증은 귀공을 높이 써주도록 항우에게 진언했다고 들었습니다. 범증은 귀공을 어떻게 높이 평가하게 되었습니까?" 한신은 "만약 군사께서 항왕을 받들고 천하를 통일하시려거든, 지금 파촉에 쫓겨가 있는 유방을 죽여 버리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군사의 뜻대로 천하를 통일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면서 한신은 남의 소개로 발탁되는 것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증표를 미리 숨겨왔다는 말과 함께 장량이 주었던 증표를 소하에게 내보인다.
한신에게 씌어진 낙인은 그가 원하는 자리를 차지하는 데는 장애물이 되었지만, 대원수가 된 뒤에는 오히려 강점으로 작용했다. 대원수 한신이 초나라를 치기 위해 원정에 나서는데 초나라 장수들은 한결같이 한신을 가난뱅이에 시정배의 가랑이를 기어간 겁쟁이 정도로 알고 한신을 무시했을 정도였다. 적들은 한신을 대원수로 발탁한 유방도 한심하기 짝이 없다고 수군거릴 정도였다. 한신은 적들이 방심하여 경계가 허술한 틈을 노려 초한대전에서 화려한 서막을 장식하게 된다. 한신은 낙인을 극복하고 성공한 위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