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쟁패기에 활약한 인물들 중 매우 특이한 인물이 있다. 계포(季布). 계포는 항우 진영의 최고 명장 중 한 명으로 활약하였고, 유방군이 해하(垓下) 주변을 포위하고 사면초가에 처했을 때 후일을 기약하고 탈출했다. 쫓기는 신세가 된 계포는 협객 시절에 사귀었던 주장(周長)이라는 임협(任俠) 집으로 숨어들어갔다. 얼마 후 유방은 계포에게 지명수배령을 내리고 천금의 현상금을 내걸고, 계포를 숨겨주고 신고하지 않는 자에게는 삼족을 멸하는 극형에 처하겠다고 공포했다.
계포를 숨겨주던 주장은 거리에 나갔다가 계포에 대한 수배령이 내린 것을 보고 집으로 돌아와 계포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장군에 대한 한나라의 추적이 여간 엄하질 않습니다. 언제 이곳을 들이닥칠지 모릅니다. 저로서는 마냥 숨겨드릴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저에게만 화가 미치는 것이 아니라 삼족에까지 미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저의 임협의 한계는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그래서 부탁인데 제 말대로 하시든가, 아니면 자결을 하셔야겠습니다.” 계포는 주장의 말대로 따랐다. 주장은 계포의 머리를 깎고 목에 사슬을 채우고 갈포(칡으로 만든 거친 옷감)로 만든 옷을 입히고 노예처럼 보이게 하여 다른 여러 노예와 함께 주가(朱家)라는 사람에게 팔았다. 한때 천하를 호령하던 장수 계포가 살아남기 위해 자존심을 내려놓고 노예가 되기로 한 것이다.
주가란 인물은 배포와 지략을 갖춘 유협(遊俠)이었다. 주가가 구해준 인물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주가는 명예나 권력을 탐하지 않고 조용히 숨어서 정의를 실천했다. 사마천은 주가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그는 평생 자기 재능을 자랑하지 않았고, 어떤 보답도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전에 자신이 은혜를 베푼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될까 두려워했다. 남의 어려움을 도울 때는 우선 가난하고 신분이 천한 사람부터 했다. 그의 집에는 남아도는 재산이 없었고, 옷은 빛깔이 바랜 것들뿐이었고, 두 가지 이상의 반찬을 먹지 않았고, 타고 다니는 것은 소달구지가 고작이었다.” 주가는 오른손이 한 이름을 왼손이 모르게 한 협객의 본보기였다.
주가는 낙양으로 가 유방의 최측근인 하후영을 찾아가 이렇게 말한다. “신하된 자로서 자기의 군주를 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계포 역시 항우의 신하로서 초나라를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싸웠습니다. 몇 번이나 한나라군을 물리친 것도 그가 유능한 신하이기 때문입니다. 폐하께서는 너그럽고 인자하신 성군이거늘 어찌 지난 일에 연연하시는 것입니까? 계포는 보기 드문 유능한 신하입니다. 지금처럼 계속 쫓기만 한다면 그는 다른 나라에 도망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한나라는 유능한 신하를 잃게 됩니다. 적으로 만들기보다 우리 편으로 만드는 것이 어떠하실는지요?” 설득력 있는 말이다. 주가는 ‘항우 휘하의 장수로서 계포가 과거에 했던 일들을 상기시키면서 그 일을 해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상대방을 띄워주면서 관대한 처분을 바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계포와 같은 인재를 잃는다면 한나라에 큰 손해가 클 것이다’라고 말한다. 주가의 말을 하후영에게 전해 들은 유방은 계포와 같은 능력 있고 충성스러운 장수에게 거액의 현상금을 걸었던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유방은 지명수배령을 취소했을 뿐 아니라 계포를 낭중(郎中, 궁정의 수레, 말, 문 등을 책임지는 관리직)으로 임명했다. 여기서 유방이란 인물이 얼마나 관대하고 대범하며 포용력이 큰 그릇인가를 확인하게 된다. 한때 적군의 장수였던 계포에 대한 적개심을 내려놓고 벼슬까지 내렸으니 말이다.
계포는 주가의 노력으로 사면이 되고 벼슬까지 하게 된 줄을 모르고 있다, 뒤늦게 알게 됐다. 계포는 은혜를 갚기 위해 주가를 만나보고 싶었지만, 주가는 평생 계포를 만나지 않았다. 협객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보여준다. 사마천은 주가의 행동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일찍이 몰래 계포 장군을 위험 속에서 구해준 적이 있었다. 계포는 존귀한 신분이 된 뒤에 그를 찾았지만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함곡관 동쪽 지역 사람치고 목을 늘이고 그와 사귀기를 원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계포는 남들이 갖지 못한 큰 자산을 가지고 있었다. 계포는 항우 휘하의 장수가 되기 전부터 협객으로 이름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특히 약속을 잘 지키는 것으로 더 알려졌다. 계포가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평판을 얻었다. 계포의 말은 곧 신용의 상징이 되었다.
어느 날 조구생이란 사람이 계포를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계포일락(季布一諾), 즉 황금 백 근을 얻는 것보다 계포의 한 마디 승낙을 받는 것이 낫다’라는 말이 있는데, 당신은 어떻게 그런 명성을 얻게 되셨습니까? 제가 천하를 유람하면서 그대의 명성을 알린다면 그대는 천하에서 더욱 귀중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부디 저를 문객으로 받아주십시오.” 계포는 조구생을 문객으로 받아주고 여러 달 동안 후하게 대접하고 돌려보냈다. 그 후에 계포의 명성은 더욱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좋은 평판을 가진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사마천은 《사기》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계포가 자기 처지와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나 보다. 사마천도 친구를 변호하다 역사서의 완성을 위해 사형 대신 굴욕적인 궁형(宮刑, 생식기를 없애는 형벌)을 택하지 않았던가. 마치 계포가 노예로 팔려가 한나라의 유능한 신하가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인지 사마천은 계포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현능한 사람이야말로 진실로 헛되이 죽지 않는 법이다. 분함을 이기지 못해서 목숨을 끊는 게 용기가 아니라, 비겁하게 욕을 보더라도 자신의 능력을 믿고 한나라의 명신이 된 계포야말로 진정한 용기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