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은 항우와의 광무산 협약을 깨고 항우의 뒤통수를 쳤다. 신의를 소중하게 여기는 장량이 생각해 낸 계략이라 유방도 적잖이 당혹스럽게 생각하였지만 이번 기회에 항우를 제압하고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절실함을 생각하면 신의 따위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항우군이 약체일 때 기습공격을 하는 것만이 항우를 제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무리 항우군의 식량이 바닥나는 등 전력이 떨어졌다고 해도 그 저력은 여전히 건재했다. 이번 기습공격의 성패는 유방을 지지하는 모든 제후의 군사들을 한데 모아 숫적으로 압도적 우위를 보여주는 연합군을 편성하는 것이다. 연합군의 중심은 제나라에 파견된 대원수 한신과 양 땅에 주둔 중인 유격대장 팽월이다. 그러나 유방이 한신과 팽월에게 사자를 보낸 지 10일이 지났음에도 한신과 팽월은 나타나지 않았다. 유방은 한신과 팽월이 오지 않아 불안하고 두려웠다. 협약을 깨고 배신자란 비난을 감수하고 항우군을 공격했는데 자칫 긁어 부스럼을 만든 격이 될 수 있었다.
유방군과 항우군은 이번에는 산악지대가 아닌 평원에서 대치 상태를 계속했다. 전쟁터가 바뀌었을 뿐 광무산 대치의 재현이다. 전쟁을 끝낼 게임체인저가 필요하다. 여러 제후가 거느린 군사 중에서도 한신의 군사가 대치를 종식할 게임체인저다. 한신은 유방의 명령서를 들고 간 사자의 말을 듣고서도 출병을 하지 않고 있다. 유방의 명령을 불복하는 것은 참형에 처해져야 하지만 유방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따질 일이 아니었다. 유방은 책사 장량과 진평을 재촉하며 묘안을 찾아보라고 한다.
장량이 고샘끝에 묘수를 찾아냈다. 장량은 한신과 팽월이 항우군 섬멸 작전에 동참하지 않은 것은, 그동안 한신과 팽월이 유방에 기여했던 공로에 대한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보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한신과 팽월이 유방에게 섭섭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장량은 유방에게 한신과 팽월에게 보다 구체적이고 눈에 보이는 영토를 주라는 계책을 제시했다. 유방은 장량의 계책에 따라 사자를 한신과 팽월에게 급파한다. 유방도 천하통일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데 그까짓 땅이 무슨 대수냐 싶었을 것이다.
장량은 한신과 팽월의 속마음을 읽고 있었다. 한신은 형식적으로는 제나라의 왕으로서 지위를 가지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보유한 영토는 없었다. 팽월 역시 항우군의 후방을 교란시키는 등 유방에게 여러 차례 큰 도움을 주었지만 실질적으로 주어진 영토 한 뼘도 없었다. 유방은 장량의 계획에 따라 한신과 팽월에게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영토를 주겠다고 약속한다. 한신에게는 제나라 영토 중에서 진현(陣縣) 동쪽에서 산동 해안 지역까지 땅을 주기로 약속했다. 팽월에게는 수양 이북에서 곡성(穀城)까지의 땅을 주기로 약속했다.
유방의 약속을 전해 들은 한신과 팽월은 어떻게 행동했을까? 그들은 모두 군대를 출진시켜 유방에게 신속히 달려오기로 했다. 한신과 팽월은 유방의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보상에 대해 신속한 군사행동으로 응답했다. 만약 유방이 항우군을 기습공격하고 있을 때 한신과 팽월의 군대가 연합군으로 참전하지 않았으면 유방군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신과 팽월은 유방군의 약점을 잘 파악하고 버티면서 실익을 챙긴 것이다.
유방은 전세가 불리할 때 우군의 도움을 받아 어려움을 극복했지만, 이때 한신과 팽월에 대한 불신은 훗날 그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화근이 되었다. 그 불신의 불씨는 유방이 한나라 황제에 오르고 난 뒤에 번져 한신과 팽월을 모반죄로 죽이는 단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토끼 사냥이 끝난 뒤 사냥개를 삶아 죽이고, 어려움은 함께 할 수 있어도 편안함은 함께 할 수 없다는 말이 괜히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어떤 행동에 대해서는 그에 따른 보상과 대가를 바라는 것이 상식이 되었지만, 왕조시대에 어떤 행동을 위해 확실한 보상이나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훗날 목숨과 바꾸는 위험천만한 일이 될 수도 있다. 특히 유방처럼 과거의 작은 일도 가슴에 담아두는 스타일의 최고권력자를 조심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장량의 처신은 귀감이 된다. 장량은 유방이 천하통일 후 논공행상에서 일등공신으로 선정되었다. 유방은 장량에게 3만 호의 식읍을 내리겠다고 하면서 제나라 땅 중에서 마음에 드는 곳을 고르라고 했다. 장량은 자신의 뜻을 밝히며 정중히 사양했다. "신은 일찍이 유(留) 땅에서 폐하와 처음 만났는데, 이는 하늘이 신을 폐하에게 내리신 것입니다. 이후 폐하께서는 늘 신의 계책을 쓰셨고, 운 좋게도 매번 신의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바라건대 신은 유땅으로 족할 뿐 3만 호의 식읍은 바라지 않습니다." 건국공신이든 창업공신이든 공을 세운 후의 처신은 공을 세울 때보다 훨씬 더 중요한 법이다. 대가가 항상 좋은 좋은 것만은 아니다. 대가에는 또 다른 대가를 요구할 수 있다. 그 또 다른 대가는 자기의 목숨이 될 수도 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