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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에게 비정한 아버지들

by 염철현

<사기> '항우본기"에 따르면, “팽성(彭城)전투에서 한나라 군대는 무너져 내려 항우는 이 싸움에서 10여 만명을 죽였다. 남쪽으로 달아난 한나라 패잔병의 뒤를 초나라 군대가 추격하여 영벽(靈壁)의 동쪽 수수(睢水) 강기슭에 이르렀다. 수많은 군사는 여기서 떼죽음을 당했고, 10여 만 명은 수수로 뛰어들었다. 수수는 죽은 한나라 군사들의 시체로 가득 찼고, 물조차 흐르지 못하였다." 유방은 60만 명의 대군을 직접 진두지휘하며 항우와 맞붙은 팽성전투에서 대패했다. 항우군은 4만 명이 채 되지 않은 정예군이었다.


팽성전투는 유방이 일국의 군주로서 위상을 보여주기 위해 벌인 야심찬 전투였다. 그동안 유방은 한신을 대원수로 발탁한 이후 모든 전쟁을 한신에게 일임하였고 실전에는 거의 참전하지 않고 있었다. 유방은 한신의 위세와 명성이 왕인 그를 능가하는 듯이 느껴졌나 보다. 유방은 한신을 후방에 남겨둔 채 자신이 직접 전투를 지휘하여 멋지게 승리를 거둬보고 싶었을 것이다. 군주로서 '나도 이런 사람이야!'라는 위신을 천하에 떨쳐 알리고 싶었다. 그러나 전쟁이란 아무나 지휘하는 것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유방이지만 한신의 공적을 시샘하고 질투하며 시작한 전쟁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유방은 형세가 불리하자 달아나기 시작했고 초나라군은 달아나는 유방의 마차를 발견하고 바짝 뒤쫓기 시작했다. 하후영이 몰던 마차를 타고 달아나던 유방은 도중에 두 자녀(6살 적장자 유영, 14살 장녀)를 발견하고 수레에 태웠다. 한참을 달아나다 유방은 말은 지치고 항우군이 바짝 뒤쫓아와 사태가 급해지자 두 아이를 발로 차서 수레 밖으로 떨어뜨리려고 했다. 하후영은 그때마다 아이들을 수레 아래에서 끌어올리고 천천히 가면서 두 아이들로 하여금 자기 목을 끌어안게 했다. 유방은 화가 나서 도중에 하후영의 목을 십여 차례나 베려고 하였으나 마침내 탈출에 성공했다. 하후영이 그런 유방에게 "비록 아무리 급해서 빨리 말을 몰 수 없을지라도 자식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사기> '하후영 열전'에 등장하는 기록이다.


<사기>에 기록된 유방의 행동을 보면 정말 그랬을까 싶을 정도로 믿기지 않는다. 적군은 바짝 뒤쫓아오고 마차가 무거워 말은 속도를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붙잡힐 것 같은 두려움과 불안감에 두 아이를 발로 차서 마차밖으로 떨어뜨리려는 아버지 유방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싶다. 대국적으로는 한나라의 왕이 되는 유방 자신이 우선 살고 봐야 한다는 것이지만, 두 아이를 마차 밖으로 내치는 냉정한 아버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유방에게 하후영은 특별한 친구다. 만약 하후영이란 고향 친구이자 유능한 마차몰이꾼이 없었다면 유방과 한나라의 운명은 또 달라졌을지 모른다.


유방은 주변에 좋은 친구들이 많았다. 유방의 소탈하고 털털한 성격도 친구들이 많이 따르는 데 한 몫을 했을 것이다. 특히 고향 패현과 풍읍에서 알게 된 친구들은 평생을 유방과 함께 정치적 동지로서 지냈다. 유방은 고향 친구들에게 특별대우를 해주었지만, 친구들도 유방의 기대에 부응하여 유방이 항우를 꺾고 중국을 재통일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유방의 친구들은 직업도 각양각색이었다. 소하와 조참은 패현 관청의 하급관리, 번쾌는 개 잡는 사람, 관영은 비단을 팔던 사람, 그리고 하후영은 패현의 마구간에서 말을 기르고 수레를 모는 사람이었다. 하후영은 사신과 빈객을 배웅하는 일을 했다. 오늘날의 관청 소속 운전기사다. 하후영은 말관리에 전문가로서 전문성을 살려 유방이 중국을 통일한 뒤로도 태복(말과 마차 관리 수장)으로 있었다. 하후영은 삼국지 조조 휘하 장수로 활약했던 하후돈과 하후연의 조상이다. 일관성 있는 삶을 이야기할 때면 하후영을 떠올릴 정도로 그는 언행이 일치했다.


하후영과 유방의 우정과 의리는 남다른 데가 있었다. 유방이 사상정((泗上亭)의 정장(亭長)으로 있을 때 관의 마차를 몰던 하후영은 거의 매일같이 사상정에 들러 유방과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유방과 하후영이 어떤 관계인가를 알려주는 일화가 있다. "하루는 유방이 하후영과 장난을 치다 하후영에게 상처를 입혔다. 유방은 그 당시 정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상처를 입히면 다른 사람들보다 무거운 형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유방은 하후영에게 상처를 입힌 일이 없다고 잡아뗐고, 하후영 역시 이를 증언하였다. 나중에 다시 심의를 받게 되었는데, 하후영은 유방의 죄에 위증죄까지 더해져 1년 남짓 옥살이를 하고 수백 대의 매를 맞았다. 그러나 끝내 진술을 번복하지 않아 유방을 사건에서 벗어나게 했다."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고 해도 하후영처럼 처신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가끔 영화에서 조폭 두목을 위해 부하가 대신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살이를 하는 경우를 보았지만, 하후영은 친구 유방을 위해 감옥형과 태형을 감내했다. 이래저래 유방이란 인물은 인덕(人德)이 많아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사귄 사람들로부터 여러 가지로 도움을 받았다. 하후영이 비정한 아버지로부터 구해준 자식은 유방이 죽은 후 왕(혜제)이 되었는데 혜제는 하영후를 특별하게 대우했다고 한다.


유방을 비정한 아버지라고 비난하였지만, 삼국지에 등장하는 영웅호걸들도 비정한 아버지상이었다. 유비는 '처자는 의복과 같지만 형제는 수족과 같다'라는 철학을 가졌다. 조운이 당양싸움에서 구사일생으로 유선(아두)을 구해오지만, 유비는 조운(자룡)에게 건네받은 유선을 땅에 내던지며 "이 못난 아이 때문에 장수 하나를 잃을 뻔했구나!"라고 말했다. 조자룡이 황급히 땅바닥에서 아두를 안아 올리며 울며 말했다. “저의 간과 뇌가 진흙에 짓이겨져도 주공의 은혜는 보답할 길이 없겠습니다!" 유비는 좋은 군주였는지 몰라도 아버지로서는 자격 미달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아끼는 장수지만 갓난애기를 내던질 필요까지 있었을까 싶다. 부하의 충성심을 자극하는 할리우드액션치고는 너무 앞서 나갔다.


조조의 첫 번째 아내였던 유씨 부인이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조조는 정씨 부인을 정실로 맞아 새 장가를 들었는데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정씨 부인은 유씨 부인에게서 난 자식들(조앙, 조삭, 청하공주)을 친자식들처럼 키웠고 모자간에 사이도 돈독했다. 197년, 조조는 완에서 장수가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것에 불안감을 느껴 그를 치러 갔다. 장수의 항복을 받고 완성에 무혈입성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호색한 조조가 장수의 삼촌 장제의 미망인을 희롱했다. 이에 장수가 조조를 기습 공격하여 조조는 팔에 화살을 맞고 죽을 위기에 몰렸다. 이때 조조의 장자 조앙이 자신이 타던 말을 아버지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뒤에 남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살아서 집에 돌아온 조조는 정씨 부인으로부터 용서받지 못했다. 조앙을 친자식처럼 키웠던 정씨 부인은 자식을 남겨놓고 혼자 돌아온 조조에게서 영원히 떠나버렸다. 정씨 부인은 "내 아들을 죽여놓고 왜 살아 돌아왔냐? 어떻게 이럴 수 있냐?"라고 조조를 원망하며 통곡했다. 조조는 부인을 친정으로 보냈다가 나중에야 찾아가서 재결합을 청하며 싹싹 빌었다. 그러나 정부인은 눈길 한 번 안 주고 외면하며, 끝내 조조를 용서하지도 그에게 돌아가지도 않았다.


삼국지에서 냉혈한으로 그려졌고 평생 후회라곤 하지 않을 것 같던 조조도 죽으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만약에 사람이 죽어서 영혼이라는 것이 있어서, 내 아들 조앙이 '내 어머니는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한탄했다고 한다.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는 속에 있는 마음을 털어놓는 법이던가. 사람 목숨이란 하늘이 내린 것이라 '인명은 재천'이라고 한다. 사람 목숨은 하늘만이 가져갈 수 있는 것이다. 유영, 유선, 조앙의 어머니가 그와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어머니가 자식을 품고 죽는 유물을 보지만 아버지가 그랬다는 소식을 듣거나 보지 못했다. 모성의 위대성을 방증하고 있다. 역사 속에서 피붙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깨닫는 바가 크다.


사마천. (2020). 신주 사마천 사기(항우본기).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사기연구실 옮김. 서울: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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