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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목(眼目)이 대세를 가른다

by 염철현

한신(韓信)은 처음에 항량 휘하에서 집극랑(執㦸郞)의 직분을 맡고 있었다. 집극랑은 하급 무관으로 의장(儀仗)과 경호 역할을 담당했다. 그런 한신이 천하 경영 전략에 대해 항우에게 몇 번 상소문을 올린 적도 있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마도 향량이나 항우 진영에서는 한신에 대한 세상의 평판, 즉 한신이 시정배들의 가랑이를 기어가는 부끄러운 짓을 서슴지 않고 가난뱅이로 빨래하는 여인네의 밥을 빌어먹었다는 소문 때문에 그를 높이는 쓰는데 주저하지 않았나 싶다. 범증만이 한신을 높이 평가해 항우에게 한신을 대장군으로 등용하도록 몇 차례 말했지만 항우는 그때마다 무시했다. 최고권력자 초패왕 항우와 그의 책사 범증이 한신을 보는 안목(眼目)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어느 날 한(韓)나라 재상을 지낸 장량이 한(韓)나라 왕을 시해한 항우에게 복수의 칼을 갈면서 절친 항백의 집을 찾아갔다. 항우가 한(韓)나라 왕을 죽인 이유는 한(韓)나라 출신의 장량이 유방을 따라 파촉으로 떠났다는 이유였다. 장량은 항백의 집에서 쉬면서 서재를 구경하고 있다 상소문집이라는 책을 보게 되었는데 누군가 항우에게 올린 상소문이 눈에 띄었다.


"천하지도에 대해 한 말씀 여쭙겠습니다. 무릇 올바른 치도(治道)란, 세력을 존중하는 데 있지 아니하옵고 천하의 기미를 명찰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천하의 기미(機微)란, 강약과 허약에 도통하고 이해와 득실의 실체를 터득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천하의 기미에도 통하지 못하면, 그 세력이 제아무리 막강하여도 그것은 일시적인 승리에 불과하여, 언젠가는 반드시 패망하게 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대왕께서는 군세를 너무 과신하지 마시고, 천하의 기미를 명철하게 살리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일시적인 득세만으로 천하를 얻으시기는 매우 어려운 법입니다."


범증으로부터 상소문을 쓴 사람이 한신이라는 말을 전해들은 장량은 한신이야말로 한(漢)나라 유방에게 꼭 필요한 대장군감이라는 확신을 하게 된다. 사실, 장량은 파촉으로 간 유방과 헤어지면서 세 가지 약속을 했다. 첫째는 항우가 진나라 수도 함양을 떠나 항우의 고향땅 팽성으로 수도를 옮기도록 부추기는 것이었다. 둘째는 유방군을 총괄한 대원수를 추천하는 것이었다. 셋째는 항우의 무력에 굴복하여 복종하는 척하는 항우 주변국들의 마음을 항우에게서 떠나게 하는 것이었다.


장량은 우연히 들렸던 항백의 집에서 상소문의 주인공을 알아내고 한신을 찾아낸다. 그리고 한나라 승상 소하(蕭何)에게 한신을 대원수로 추천하는 증표를 건네주었다. 장량이 대원수감을 찾은 것에 비하면 항우가 함양에서 팽성으로 수도를 옮기도록 부추기는 일은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었다. 장량은 도사로 변장을 하고 이런 노래를 퍼뜨렸다. "담장 저편에서 방울을 울리니 소리는 들려도 사람은 보이지 않네. 몸이 귀하게 되고도 고향에 돌아가지 않음은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걷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일이다" 항우가 함양에서 멀리 떨어진 그의 고향땅 팽성으로 옮겨가기를 촉구하는 노래다. 때마침 미복잠행을 나온 항우는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게 되고 팽성으로 도읍을 옮기기로 결정한다. 또한 항우를 두려워하여 항우에게 겉으로 복종하는 것처럼 행세하는 주변 국가들을 설득하는 것은 장량의 주전공이나 마찬가지였으니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오랜 된 도자기도 안목(眼目)에 따라 보물로 판정받기도 하고 평범한 용도의 생활용품이 되기도 한다. 물건도 아닌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웬만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능력을 잘 알아보는 사람을 지인지감(知人之鑑)의 능력을 가졌다고 하던가. 한때 우리 사회에서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는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지만, 사실 그 말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필요한 금과옥조(金科玉條)가 아닐 수 없다. 진나라 말기와 초한쟁패기에 불세출의 영웅이라면 단연코 한신 대장군을 꼽고 싶다. 무력을 행사하는 것에서는 항우를 따를 자가 없을 것이지만, 그 무력을 지략으로 제압한 영웅은 바로 한신이기 때문이다. 그런 한신의 능력을 제대로 알아보는 지인지감의 능력을 가진 장량의 안목이 초한쟁패에서 한나라가 결정적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변수가 되었다. 지도자 본인이 지인지감이 부족하다면 그런 능력을 가진 참모를 쓰는 능력이라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은 최소한의 자격일 것이다.


결국 유방과 항우의 초한쟁패는 사람을 보는 안목에서 결정이 났다고 할 것이다. 유방만큼 수많은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활용한 위인도 드물 것이다. 지인지감이 뛰어난 지도자였다. 대장군 향량이 죽고 항우가 숙부 향량의 복수를 다짐하며 반진 세력의 우두머리가 되었을 때였다. 한신은 향량을 지키지 못한 책임을 지고 벌을 받는 중에 친구 종리매가 항우에게 따졌다.


종리매: "장군은 왜 한신에게만 책임을 물어 묶어놓습니까? 한신이 대장군을 호위하지 못한 책임이 있지만, 우리 모두의 책임이 아니겠습니까? 너무 불공평합니다."


항우: "그 말을 한신이 하라고 시킨 것입니까?"


종리매: "한신은 그런 말 하지 말라고 말렸고, 지금은 복수할 때가 아니라 빨리 설성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항우: "집극랑 주제에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합니까?"


유방: "아니지요. 사람은 각기 재주가 다른 법인데 그 자에게 식견이 있다면 직접 데려와 들어보시지요."


유방도 사람을 보는 안목을 갖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사람은 각자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다. 신분과 귀천을 놓고 사람을 가려 쓰는 항우와의 차이다. 이 차이가 초한대전의 성패를 갈라놓았을 것이다. 유방이 죽기 얼마 전 황후 여치가 유방에게 묻고 유방이 대답하는 장면을 보자. 지도자라면 사람을 보는 안목이 유방정도는 되어야 한다.


여치: "소하 승상이 건강이 좋지 않아 물러나겠다고 하는 데, 만약 소하가 사임하면 승상의 자리를 누구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습니까?"


유방: "소하가 기어코 승상의 자리를 내놓겠다면, 조참(曺參)을 승상에 임명하도록 하시오."


여치: "조참 이외에 승상이 될 만한 인물로 또 누가 있습니까?"


유방: "그다음의 적임자는 왕릉(王陵)입니다. 그러나 왕릉은 지혜가 다소 부족한 편이므로 왕릉을 승상으로 등용하려면 진평을 보필자로 붙여 줘야 합니다."


여치: "그렇다면 진평을 직접 승상으로 등용하면 어떻습니까?"


유방: "진평은 지혜롭기는 하나 나라를 혼자서 다스려 나갈 만한 도량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치: "주발(周勃)은 어는 정도의 사람입니까?"


유방: "주발은 믿음직스럽기는 하지만, 학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 유씨 일가를 위해서는 주발처럼 충성스러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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