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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Sep 24. 2020

북촌(北村)의 역사와 현대적 의미

부동산 개발업자 정세권(鄭世權 1888-1965)의 등장

조선시대 한양에는 신분이나 직업에 따라 거주지가 달랐는데 그 경계는 종로였다. 왕족과 양반 관료는 경복궁과 창덕궁을 연결하는 직선 이북 지역, 지금의 계동, 가회동, 재동, 원서동, 안국동 등의 북촌 지역에 살았다.한양을 남촌과 북촌으로 나누면 그 중간 지대인 청계천 일대를 위항(委巷)이라고 한다. 위항은 좁은 골목길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민가를 말한다. 양반계급이 사는 거주지와 대비되는 표현이다. 인왕산 일대의 누상동, 누하동도 위항이었다. 위항인 청계천 일대에는 역관이나 의원에서부터 상인에 이르기까지 재산이 넉넉한 중인들이 살았다. 인왕산 언저리에는 주로 중앙 하급 관리인 경아전(서리나 아전)이 많이 살았다. 지대가 높고 외져 집값이 쌌기 때문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서울을 중심으로 위항 문학이 싹트기 시작했는데 중인ㆍ서얼ㆍ서리 출신의 하급관리와 평민들에 의해 이루어진 문학 양식을 위항 문학 또는 여항 문학으로 부른다.  

  

일제는 병합 이후 한성을 경성으로 개명하였다. 경성에는 근대식 건물과 거리가 만들어지고, 총독부는 근대적 도시 계획을 기획, 디자인하였다. 또한 급속한 도시화 과정을 거치며 인구가 과밀해져 경성은 도시문제, 주거문제에 직면하였다. 일본인들이 이주하며 도시를 점유하게 되면서, 1910년대 중반 경성은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는 청계천 남쪽과 조선인이 다수인 청계천 북쪽으로 양분된 상태였다. 1920년대로 접어들면서 청계천 남쪽 지역이 급증한 일본인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게 되자, 총독부는 정부기관을 국공유지에 먼저 입지 시킨 뒤 일본인을 진출시키는 방식으로 청계천 북쪽으로 일본 세력 확장을 주도하였다.

            

이때 민족의식이 강한 건축업자 정세권이 등장한다. 정세권은 우리 민족 최초의 대규모 주거단지개발업자라고 할 수 있다. 정세권을 주축으로 김종량, 이민구 등 조선계 건설업자들이 조선인의 영역을 지키고자 민간 주택건설사업에 진출하였다. 이들은 기존 귀족이 소유하였던 넓은 토지나 택지를 쪼개 여러 채 작은 규모의 한옥을 대량 공급함으로써 조선인의 주거지역을 확보하였으며,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에게 밀려나면서 고유의 주거지역과 주거방식을 잃어버리는 것을 막았다. 


이렇게 한옥 집단지구에 공급된 한옥은 전통한옥의 구조를 ㅁ자 안에 집약하고, 부엌과 화장실을 신식으로 개선하는 등 근대적인 편리함과 생활양식을 반영한 도시한옥(개량 한옥)이었다. 종로구 가회동 31번지는 대규모 도시 한옥 단지로 개발되었는데, 이곳이 현재의 북촌 한옥마을이다. 


정세권은 1920년대 북촌과 익선동, 성북동, 헤화동, 서대문, 왕십리 등 경성 지역에 한옥 대단지를 조성하였다. 특히 그는 전통 한옥에 근대적 생활양식을 반영한 개량 한옥을 대량 공급하여 조선인의 주거지를 확보하고 조선인의 주거문화를 개선하는 데 공헌하였다. 그는 단순히 부동산 개발업자가 아니었다. 그는 민족자본가로서 부동산 개발로 벌어들인 자본을 조선물산장려운동과 조선어학회 운동에 지원하며 독립운동을 했다. 실제 조선어학회 건물을 지어 기증하기도 했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전철 3호선 안국역에서 하차하여 2번 마을 버스 를 타고 감사원 방향의 정류장 표지판에는 '정세권 활동 지역'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북촌은 해방과 근대화, 산업화를 거치는 과정에서 보존과 개발의 경계선상에 놓여 있었다. 1983년 한옥 보존지구로 지정되고, 1991년 한옥 보존지구가 해제되면서 건축규제도 완화(10m 고도제한)되었다. 1994년 고도제한 해제 후 한옥들이 철거되면서 빌라, 다세대 주택 건축 등 난개발이 진행되었다. 현재 북촌의 한옥 외에 빌라와 다세대 주택들은 그 당시 건축된 건물이다. 2000년대 한류의 영향 등으로 외국 관광객이 쇄도하면서 2006년에는 북촌 장기 종합대책을 수립하고 북촌 8경을 지정하는가 하면 지자체에서 한옥을 매입하거나 박물관을 설립하는 등 장기적 보존 대책을 진행하고 있다. 북촌 팔경(八景)은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룬 서울의 보기 드문 풍경이다. 1경은 북촌에서 바라보는 창덕궁, 2경은 원서동 공방길, 3경은 가회동 11번지 일대, 4경은 가회동 31번지 언덕, 5경은 가회동 골목길(내림), 6경은 가회동 골목길(오름), 7경은 가회동 31번지, 8경은 삼청동 돌계단길.


오늘날 북촌은 한국의 전통문화를 확인하고자 하는 외국 관광객의 인기 방문지로서 관광산업의 성쇠(盛衰)를 가늠하는 저울과 같은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중국의 사드 보복에 따른 중국 관광객 감소로 북촌 일대의 상가가 썰렁하였지만, 대신 동남아 지역의 관광객 수가 증가하였다. 북촌 관광객은 2016년(268만 명), 2017년(368만 명), 2018년(470만 명)으로 매년 증가 추세에 있었다. 최근 <코로나 19>로 북촌은 관광객으로 부쩍이고 활기찬 모습은 사라졌다. 외부 환경의 변화로 가장 타격을 많이 받은 관광지 중 한 곳이다.


2000년대 이후 상업 공간을 중심으로 카페나 공방, 갤러리 등이 들어서면서 유동 인구가 늘고 상권이 활성화되면서 대형 프랜차이즈 점포가 입정하는 등 자본이 유입되면서 대규모 상업지구로 변모하였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치솟은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게 된 기존의 소규모 상인과 원주민들이 거주지역을 떠나는 젠트리피케이션이 진행되면서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김경민(2017). 건축왕경성을 만들다. 경기: 이마.

허경진(2016). 조선의 중인들. 서울: 알에치코리아.

최준식(2018). 동 북촌 이야기. 서울: 주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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