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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Sep 24. 2020

남연군 분묘 도굴 사건

잘못된 방법과 명분

남연군 이구(1788 ~ 1836)는 흥선대원군(1821 ~ 1898)의 생부이며 고종의 조부이다. 1868년 충남 예산군 덕산면 소재 남연군의 분묘(무덤) 도굴 사건이 발생했다. 어느 국가, 사회던 망자의 유해를 함부로 손대지 않은 것은 불문율이다. 하물며 유교 국가 조선의 사정이야 말할 필요가 없다.  부관참시를 최고의 불명예와 악형으로 꼽지 않았던가. 독일인 오페르트(Ernst J. Oppert)라는 자가 도굴을 주도했다. 그는 인종학 연구 학자이면서 상인이었다. 도굴 전 2차에 걸쳐 조선 서해안에 도착하여 교역을 요구하였던 적이 있다. 도굴 사건의 전말을 알기 위해 당시 흥선대원군이 주도한 쇄국, 천주교도 탄압과 이로 인한 병인양요로 거슬러가야 한다.  


조선은 19세기 이래 서구로부터 문호 개방을 요구받게 되는데 결코 응하지 않는다. 문호 개방은커녕 종교 박해가 심했지만 오히려 천주교 신자들은 늘어났다. 종교의 불가사의한 특성이다. 웬만한 믿음으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많을 때는 2만 명이 넘었다. 흥선 대원군은 어린 나이에 왕이 된 고종을 대신에 국정을 장악했다. 1866년(고종 3년) 전국에 천주교 탄압령을 내리고 대대적인 숙청에 들어갔다. 조선의 천주교도 8천여 명이 학살되었고, 당시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된다. 병인박해다.  


구사일생으로 중국 탈출에 성공한 신부가 중국 주재 프랑스 제독 로즈(Pierre-Gustave Roze)에게 사건의 진상을 보고하고 조선에 남아 있는 2명 신부의 보호를 요청하였다. 로즈 제독은 프랑스 함대 7척으로 강화도를 점령했다. 병인양요다. 로즈는 프랑스 신부 살해자에 대한 처벌과 통상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흥선대원군은 요구를 묵살하고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뜻밖에 양이(洋夷)를 쉽게 패퇴시킨 흥선대원군은 자신감을 가지고 나라의 빗장을 더 굳게 걸어 잠근다. 


1868년 5월 10일 백인 8명, 조선인 천주교 신자 약간 명, 말레시아인 25명, 100명 내외의 중국인이 서해안 덕산읍에 위치한 가야산을 찾아갔다. 그곳에는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의 묘지가 있다. 다국적 도굴단의 핵심 멤버는 독일 상인 오페르트, 자본을 댄 미국인 기업인 젠킨스(F. B. Jenkins), 도굴 계획을 적극 지지하고 통역으로 따라나선 프랑스인 선교사 페롱(Stanislas Féron)이다. 이들에게는 크게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는 묘지의 보물을 약탈하고 시신을 탈취한 뒤 흥선대원군과 교섭하여 재물과 교환하고 잘되면 통상 조약까지 맺어보자는 것이다. 둘째는 천주교 박해에 대한 보복이다. 이 제안은 박해를 피해 달아난 조선인 교인(오페르트 저서에 기록되어 있지만 논란이 있다)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조상묘를 파헤쳐 도굴을 하자는 제안을 했을까 싶지만 이것은 아니다. 야간에 이루어진 도굴 작업 현장에는 인근 백성들이 모여들었고  반인륜적 파렴치한들에게 돌멩이를 던져 항의했다. 묘지기 이대근은 총으로 무장한 도굴단에게 용감하게 맞서 벼슬을 하사 받았다. 아무리 흥선대원군이 밉다고 해도 조상묘를 도굴하는 것은 결코 납득할 수 없었다. 산 사람이 아닌 유해를 볼모로 협상을 하겠다는 발상에 기가 차다. 


도굴은 실패로 끝났다. 흥선대원군은 남연군의 묘를 3번 이장했는데 이런 사태를 예상했는지 삽과 곡괭이로는 불가능했다. 봉분은 단단한 석회 덩어리로 둘러싸였다. 도굴은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흥선대원군에게 박해와 쇄국의 국내외적인 대의명분을 실어주었다. 박해는 더 심해졌고 천주교가 강상의 윤리를 도외시하는 극악한 집단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조현범(2016)은 도굴 사건을 이렇게 평가했다. “오늘날까지도 도굴 사건은 황사영 백서 사건과 더불어 박해 시대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적인 스캔들로 남게 되었다. 당시 선교사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페롱 신부를 전출시키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조선 교회가 입을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노력하였다”라고 밝혔다.


오페르트는 사건 뒤 조선 체험담을 책으로 출간했다. <금단의 나라 조선>.  전문가들은 이 책의 신빙성에 많은 문제가 있는 것으로 평가한다. 정직하지 못하고 자기변명을 늘어놓는 기록이 많다.  그는 도굴의 목적이 남연군의 유골 탈취였다는 것은 숨기고 대원군이 무덤에 보관하던 유물을 빼앗아 조선에 개방 압력을 가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도굴 사건을 처음 계획한 것은 조선의 신자들이었고 이에 동조한 페롱 신부가 오페르트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식으로 표현한다. 참 후안무치하고 뻔뻔한 사람이다.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한국 가톨릭대사전>에서는 남연군 묘지 도굴 사건을  ‘덕산 굴총 사건’으로 표기한다. 도굴이란 말을 순화하였다. 이 사건은 조선과 관련 당사국에도 큰 충격을 줬다. 오페르트는 독일로 돌아간 뒤 함부르크에서 영사 재판을 받고 잠시 수감 생활을 하였고, 젠킨스는 미국인에 의해 고발당했으며, 페롱 신부는 프랑스로 소환됐다. 조상 묘소를 중시하는 조선에서 외국인에 의해 저질러진 묘소 도굴 사건은 천주교 박해와 쇄국을 한층 강화시키는 빌미를 제공했다. 세상에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한다. 도굴 사건이 없었다면 흥선대원군과 위정자들이 문호 개방과 서양 문물의 수용에 대한 대응 방법이 달라졌을까 생각해본다.  


조현범(2017). 덕산 사건과 프랑스 선교사 페롱. 정신문화연구, 제40권 제3호. 61- 91.

Oppert, Ernst J. (1880). A forbidden land: Voyages to the Corea. 신복룡. 장우영 역주(2019). 금단의 나라 조선. 집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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