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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Sep 23. 2020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헐버트 이야기 ②

경천사지 10층 석탑(국보 86호) 반환 스토리

이웃 나라 일본이 우리나라에서 약탈해 간 문화재의 목록을 정리하면 몇 권의 책으로도 부족할 정도다. 한 나라의 문화재란 그 구성원의 생각, 가치관, 신념체계, 행동양식의 내재적, 외재적 표현이며 얼이 깃든 문화라는 점에서 일본의 문화재 약탈은 용서치 못할 중범죄다. 영국의 런던 박물관이나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서 약탈한 문화재를 자기 것인 양 전시해놓고 있는 것을 보면 일본의 데자뷔를 보는 것 같다.     


경천사지 10층 석탑(국보 86호)은 고려 1348년에 제작된 것으로 원래 개성에 있었다. 이 석탑이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복도에 자리 잡고 있다. 고려의 융성했던 불교문화를 보여주는 이 석탑이 어떻게 박물관에 터전을 잡게 되었을까? 이 석탑의 밀반출과 반환 과정은 우리나라 문화재의 수난사를 상징하고 있다.

     

1907년 고종은 을사늑약(1905)의 불법과 부당함을 국제적으로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담에 밀사들을 파견한다. 을사늑약의 핵심은 우리나라 외교권의 박탈로 우리나라가 국제 사회에서 대표성을 띨 수가 없다는 의미다. 밀사들은 여러 국가 대표들이 모인 자리에서 늑약의 불법과 부당함을 호소하고자 눈물겨운 노력을 했지만 일본의 집요한 방해로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사 파견 자체는 국제적으로 일본을 긴장시켰다.

     

이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에게 왕위를 양위하게 한다. 이때 문제의 인물, 다나카 미스 야키(田中光顯)가 한반도에 온다. 그는 일본 궁내대신으로 순종의 가례(혼례)를 축하할 목적을 띠고 특사 자격으로 왔지만 딴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는 헌병들을 동원하여 석탑 약탈을 저지하는 개성 주민들을 총칼로 위협하고 한 밤 중 석탑을 밀반출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헐버트는 일본의 문화재 약탈을 언론에 기고하고 반환을 촉구한다. 헐버트는 석탑이 있던 개성 현장으로 직접 찾아가 증빙 자료를 사진으로 촬영하고 명백한 증거를 수집한다. 한두 번 언론에 보도되었다고 반환할 정도의 양심을 가진 일본인이었으면 처음부터 훔쳐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헐버트는 국내 언론 폭로에 한계를 깨닫고 다른 전략을 구사한다. 일본 영자 신문 <Japan Chronicle>과 <New York Post>에 증빙 사진과 함께 약탈 사실을 기고한다. 하물며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로 파견되었을 때도 현지 신문에 석탑 밀반출을 폭로하였다. 결국 일본은 계속된 국내외 반환 여론이 비등해지면서 1918년에 이르러서야 석탑을 반환한다.     


또 놀라운 사실(史實)은 헤이그 만국평화회담 밀사 파견은 헐버트가 고종에게 제안하고 고종이 제안을 승인하여 이루어졌다. 헐버트와 외국 선교사들이 교대로 고종의 불침번을 선 것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바람 앞에 등불과 같은 누란(累卵)의 한반도 정세에서 헐버트는 고종의 절대적인 신임 속에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의 외교 및 대화 창구 역할을 했다. 대개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 한국인 3인이 헤이그 밀사로 알려지고 있지만, 헐버트도 특사 자격으로 함께 헤이그로 파견되었다. 헐버트는 외국인이라는 점에서 일본의 감시를 따돌릴 수 있었으며, 열강에게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호소하는 데 유리하였다.      


일본에게 눈엣가시와 같았던 헐버트는 1907년 미국으로 추방되다시피 하지만 미주에서 그는 더 왕성하게 대한의 독립과 주권 회복을 위해 노력한다. 그는 평소 "웨스터민스터 사원보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 안장된 그의 묘지명에 적힌 글이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고 자신의 조국보다 한국에 헌신했던 빅토리아풍의 신사 호머 헐버트 박사 이곳에 잠들다.” 외국인이 약소국의 독립과 주권 회복이라는 대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안중근 의사가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암살하고 뤼순 감옥에 있을 때 간수에게 한 말이다. “헐버트는 한국인이라면 하루도 잊을 수 없는 인물이다.” 새삼 헐버트 박사의 한국, 한국인에 대한 끝없는 사랑과 헌신에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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