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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Sep 23. 2020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헐버트 이야기 ①

한국학 연구의 개척자

19세기 말 우리나라는 근대국가로의 이행을 위해 자주적인 개혁안을 실행에 옮긴다. 교육 분야의 개혁으로는 교육 조칙(1895년)을 발표하고 교육입국(敎育立國)의 의지를 천명하면서 외국어와 신학문의 교육을 담당할 외국인 교사들을 초빙한다. 외교관계를 수립(1882년)한 미국 국무부에 의뢰하여 교사 3명을 초빙하게 되는데 이때 우리나라에 입국한 교사들 중 한 명이 호머 B.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 박사다.


헐버트는 목회자이면서 역사, 문화, 언어, 예술 분야에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 남달랐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학교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의 교사로서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틈틈이 한글과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에 대해 공부했다. 그가 얼마나 우리나라를 사랑했는가에 대해서는 그가 남긴 자취들이 말해준다. 서울시에서는 헐버트의 한글 보급의 공헌을 인정하여 주시경과 함께 부조상을 세웠고, 경북 문경새재에 가면 헐버트가 우리나라 아리랑에 서양 음계를 붙인 악보를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의 진면목을 알리기 위한 헐버트의 노력은 여기에 모두 담을 수 없을 정도다.


놀라운 사실은 헐버트 박사가 고종의 침전에서 불침번을 섰다는 것이다. 믿기지 않는 일이다. 왕을 지키는 신하와 군사들이 있을 터인데 외국인이 일국의 왕을 보호하기 위해 보초를 섰다. 일본이 저지른 을미사변(1895)으로 왕비 시해라는 극악무도한 만행을 겪은 고종은 신변에 극도의 불안과 공포를 느꼈는데 궁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조차 믿지 못했다. 고종은 당시 조선에 와있던 선교사들과 조선 주재 외교관들에게 자신의 신변보호를 요청하였다. 이들이 3인 1조로 불침번을 섰다. 음식은 정동에 있는 언더우드 선교사 집에서 조리하여 자물쇠를 채워 운반하고 고종에게 직접 열쇠를 전달하였다. 일본이나 친일 분자들이 음식에 독을 탈지도 모르는 우려 때문이었다. 고종은 왕비 시해 후 그 분노와 울분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국모 참살에 원수를 갚아주는 사람에게 나의 머리를 깎아 신발을 만들어줄 것이다.”


학창 시절 한창 감수성이 민감할 때 한국사 시간은 고문과 자괴의 시간이기도 했다. 특히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제국주의 국가와 서구 열강들이 호시탐탐 우리나라를 집어삼키려고 기회를 엿보는 역사를 공부하면서 우리 선조들에 대한 무능과 배신과 허영에 피가 끊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교과서를 집어던져버리고 싶은 마음은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나라를 위해 몸과 혼을 바쳤다. 그들의 영혼은 별이 되어 우리나라를 굽어 지켜주고 있다. 헤아리기 어려운 별들 중 그 어느 한국인보다 한국을 사랑했던 헐버트 박사가 이 땅에 남긴 그의 유지(遺志) 또한 기억하면 좋겠다. 한글을 무척 사랑했고 한글을 인류 최고의 문자 발명으로 평가한 헐버트는 이렇게 외친다. “한글과 견줄 문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헐버트가 끔찍이 사랑했던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는 그 영광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거울이면서 나침반이다. 외국인으로서 헐버트 박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조차 알지 못했거나 외면하고 있었던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내재된 위대성과 잠재성을 알게 해 준 한국학 연구의 개척자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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