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집에 들어오며 거실 한복판에 벗어던진 가방이 벌러덩 뒤집어졌다. 배를 드러낸 채 바로 일어서지 못하는 무당벌레처럼 가방이 좌우로 흔들거렸다. 아이가 입을 열기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이 갔다. 며칠 전 친구랑 다퉜는데 화해를 하지 못하고 서로 감정적으로 대치상태인 걸 알고 있다.
“그렇게 계속 신경이 쓰이면 싸우든 화해를 하든 어떤 쪽으로든 푸는 게 낫지 않아?”
“때려주고 싶어.”
“그럼 때려. 싸워봐.”
학교에서 학교폭력에 관한 주입식 교육을 받은 탓에 싸우면 무조건 큰일이 난다고 생각할까 봐 뒷일 걱정하지 말고 네 방식대로 해결해보라고 부추겼더니 전혀 의외의 말이 돌아왔다.
“못 때리겠어. 으으. 사람을 못 때리겠어!”
꽉 쥔 주먹을 부르르 떨며 과장된 목소리로 내뱉는 독백은 연극의 한 장면 같았다.
본인이 되레 얻어맞을까 봐 겁이 나는 게 아닐까 미심쩍어 넌지시 찔러보니 고개를 젓는다. 덩치도 자기보다 작고 힘도 자기가 더 세다며 진지하게 차라리 자기를 먼저 때려주면 좋겠다며 한숨을 쉬었다. 표정이 얼마나 간절해 보이던지 병뚜껑도 못 따는 내 주먹이라도 빌려주고 싶어질 뻔했다.
그러니까 아이는 친구와 화해하기를 포기하고 한 판 붙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지만 막상 사람에게 주먹을 날리지 못하는 자신을 깨닫고 커다란 철학적 혼란에 빠진 것이다.
그런 호전적이고,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앞서는 무조건적 반사 기질은 타고나야 하는 거다. 우리 집 가족을 봐라. 길가에 꽃도 못 꺾는 사람들인데 네가 누굴 닮아 그런 성향을 갖고 있겠냐. 그냥 포기하라고 다독여 방으로 들여보냈다.
“사람을 때릴 수만 있다면!”
무대 밖으로 사라지며 절규하는 배우의 마지막 대사가 왕왕 울렸다.
아이는 막 자아정체성 형성 시기에 돌입했다. 부모로부터 자신의 존재로 이어진 질기고도 찐득한 탯줄을 잘라버릴 때에 이른 것이다.
타인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에 대한 고민으로 밤잠을 뒤척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요즘 부쩍 외모에 관심도 는 것 같다. 자기 얼굴이나 들여다볼 것이지, 애꿎은 내 얼굴을 씹고 뜯는데 가차 없다.)
숱한 밤들이 가슴에 불을 지펴 그때마다 세상을 향한 반발심으로 팽배해진 아침을 선물처럼 맞이하기를.
이제 내게 남은 역할은 아이가 무럭무럭 부풀어 올라 잘 익은 빵이 될 수 있도록, 효모 한 꼬집에 그칠 뿐이다. 스스로 잘 익은 아이는 다른 이에게 따뜻함과 배부름을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중 간디 편에 이런 구절이 있다.
‘모든 폭력은 상상력의 실패를 나타낸다. 비폭력은 창조성을 요구한다.’
친구에게 당한 억울함에 분노로 치를 떨며 복수를 꿈꾸는 아들에게 간디의 입을 빌려 내 맘을 전해 본다.
통쾌한 복수극을 원한다면 그대여, 기똥차게 창의력을 발휘해 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