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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유미 Apr 19. 2023

감정 레시피



바람을 타고 비처럼 날리는 벚꽃 잎에 뺨따귀를 맞으며 그날 네가 떠올랐어.

무심한 눈빛으로 내 심장에 손찌검을 하던 폭력적인 너를.

나를 외면하는 네 시선 끝에서 내 영혼은 발가벗겨졌어.

지푸라기 몇 올이라도 그러모으고 싶은 내 자존심은 네 말 한마디에 무참히 짓밟혔어.


‘왜 항상 너는 피해자고 나는 가해자야?’


왜. 항상. 너는. 피해자고. 나는. 가해자야. ?

저 말 끝에 붙은 건 물음표일까 느낌표일까?

혹시 내가 찾아내지 못한 숨은 뜻이 저 단어들 사이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느라 머리가 어지러웠어.

학창 시절 봄가을 소풍 때마다 보물찾기를 했지만 한 번도 두 겹으로  접힌 사각 모양의 흰색 종이를 찾은 적이 없었어.

보물 찾는 데 재주가 없어서 네 말속에 숨은 뜻을 찾아내는데도 실패한 걸까.

아니면 나는 저 말을 부정하고 싶은 걸까.

시비를 가려줄 재판관 앞에 서있는 것처럼 오금이 저렸던 건 자신의 감정에 확신에 찬 너의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감정이 뒤죽박죽 섞여서 반죽이 돼버린 나는 오븐에 구워지고 나서야 본래 빵이었는과자였는지 구분할 수 있는데 그런 기다림의 시간 없이도 너는 스스로의 감정을 틀에 분명하게 찍어서 앞뒤 투명한 비닐봉투에 담아 내놓을 수가 있다니 좀 놀라웠어.


‘언제까지 냉랭할 건데?’


너는 어제 새로운 물음표를 내게 주었어.

밀가루 반죽이 12시간의 1차 발효와 40분의 2차 발효를 거쳐 180도 예열된 오븐에서 30분간 구워져야 식빵이 되듯이 내 감정이 익어서 무엇이 될 때까지 걸리는 시간에 관한 정확한 레시피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그런 걸 갖고 있을 리 만무하다 보니 너라는 오븐 안에서 내 감정들은 어떨 땐 너무 뜨겁고 오래 익어 새카맣게 타버리기도 하고 어떨 땐 모양은 멀쩡한데 속은 풋내가 나며 설익기도 해.


나도 지금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답답해.

시간을 견디는 중이야.

이문세가 부른 노래처럼.

언제쯤 세상을 다 알까요? 언제쯤 사랑을 다 알까요?

얼마나 살아봐야 알까요? 그런 날이 오긴 할까요?

나 자신에 대한 계량된 레시피 하나 없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끊임없이 스스로를 견뎌 내야 하는 일이야.

수치스러운 자신, 초라한 자신, 모멸적인 자신을 계속해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해.

사랑은 그런 내게 가끔 알레르기성 과민반응을 일으켜.

그럴 땐 두 배 세 배로 더 부정적인 자신을 견뎌내야 해.

계속 살다 보면 스스로를 견디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긴 할까?


타이머가 울리면 탄 빵이든 덜 익은 빵이든 어쩌면 이번엔 제대로 익은 빵이든 뭐든 만들어지겠지.

그때까지 그냥 기다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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