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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유미 Apr 21. 2023

하찮은 유전자




테니스 수업을 다녀온 아이가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무심히 말했다. 요즘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중이라 대게는 매사에 심드렁하지만 가끔 터진 자루에서 콩이 새듯이 진지한 고민을 말속에 흘릴 때가 있다. 내가 그 콩을 눈치껏 줍는 날도 있지만 모르고 지나쳐버린 날엔 아이 마음속에서 뱅글거리는 콩알들이 며칠씩 굴러다니기도 했을 것이다.    


“테니스 선생님이 나보고 장난하지 말래.”

“연습할 때 장난쳐?”

“아니. 열심히 하는데 그래.”

“그래? 속상하겠네.”

“그냥 못 쳐서 그런 건데, 자꾸 장난하지 말래.”

“그건 좀 슬프다.”    


맞장구를 쳐주고 돌아서서 쿡쿡 웃었다. 매우 웃픈 상황이었다.

선생님은 그동안 학생들을 가르치며 쌓은 수많은 경험과 사람의 운동 능력에 대한 전문가적 이해로 저런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사람이라면 저렇게 못 할 수는 없다고.

아이 심정이 너무나 잘 이해가 됐다. 도대체 (눈 씻고 찾아보면) 좋은 점 다 제쳐두고 뭣하러 이 하찮은 유전자를 물려받았을까 싶어서 진심으로 미안했다.    


유발 하라리 말대로 진화적으로 안정한 유전자들의 산물이 이 몸이라고 치자. 그렇다면 운동 능력치가 현저하게 낮은 이 유전자는 자신만 살아남을 수 있다면 개체의 사회생활이나 체면, 행복, 자존감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정말 이기적이고도 이기적인 유전자임에 분명하다. 아니, 이기적인 저 자식의 생존이 이 몸의 효율에 달려 있다면서 그럼 자신을 생각해서라도 최소한 근육을 쓸 수는 있는 생존기계를 만들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나 역시 어릴 때부터 테니스 선생님처럼 지극히 상식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을 숱하게 만났다.

초등학교 운동회 날, 달리기 시합 출발선에 서서 보면 운동장에 그어진 길고 곧은 흰 금이 지옥까지 이어진 것만 같아서 신나고 들뜬 기분에 찬물을 끼얹었다.

“유미야, 그렇게 설렁설렁 뛰지 말고 열심히 달려야지.”

정작 설렁설렁 뛴 아이들은 모두 앞서 들어가고 죽을힘을 다해 꼴찌로 들어온 내 사정을 이해하는 담임 선생님은 6년 내내 없었다.

학창 시절 나를 겪은 모든 체육교사들도 한마음으로 통했다. 멀리 공 던지기를 하면 공을 바닥에 내팽개치종목이 아니라고 했고 멀리뛰기를 하면 제자리 뛰기가 아니라고 이구동성으로 지적했다.


오래전 헬스장에서 운동 트레이너가 된통 당한 적도 있다. 누구 하나 깔아뭉갤 것만 같은 레그 프레스 머신 밑으로 나를 밀어 넣는 에게 내 몸 상태에 대해 주의를 주었는데 그때 내가 30대였는데 50대 여성도 이 정도는 가뿐히 들어 올린다며 내 걱정을 호탕하게 웃어넘기던 트레이너는 다음 날 내게서 앉지도 서지도 못하게 됐다는 전화를 받고 아무 말이 없었다. 그 뒤 한 달간 헬스장이 아니라 한의원을 다녀야 했음은 물론이다.


근래에는 갓바위에 오르다가 낭패를 보았다. 심장이 심각하게 요동치는 바람에 위부터 대장까지 소화기관이 죄다 놀래서 위아래 동시에 내용물을 쏟을 뻔했던 긴박한 상황을 글로 남겼었다.    

어디까지 고백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냉면 먹고 감기 걸린 일, 친구와 한두 시간 신나게 떠들고 나서 다음날 목이 부은 일...... 이런 것까지 밝혀야 하나 싶기도 하고.


나를 닮을까 봐 아이에게는 어려서부터 꾸준히 운동을 시켰다. 다행히 잘하는 것에 관심이 없어서 여러 운동을 재미나게 배웠다.

유소년 축구교실을 오랫동안 다녔는데 요즘  친구들과 축구를 할 때면 거치적거린다고 비키라는 소리를 가장 많이 듣는다고 한다.

인라인스케이트를 배울 때도 자전거를 배울 때도 익히는데 걸릴 거라고 예상되는 보편적 시간 정도는 우습게 넘겼다.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서고 탈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아이가 등교한 후 방을 정리하다 책상 위에 버려져있는 파스를 발견했다. 쉬는 시간에 친구가 자기에게 초크 기술을 걸어보라고 해서 팔로 친구 목을 감았다가 자기 팔을 다쳐왔다.

평소 자긍심이 넘치는 이라 여간해서 자신이 몸을 못 쓰는 걸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데 연타로 당해서인지 저런 소리를 하는 걸 보니 속이 상했던 모양이다.


바야흐로 사춘기다. 땀과 호르몬이 뒤범벅된 냄새를 풍기며 괜한 힘겨루기와 헛짓거리를 해대지 못해 좀이 쑤시는 시기인 것이다. 징글징글한 사파리 속에서 현명하게 살아남는 법을 터득하길 바라본다.

따지고 보면 아이는 쉬지 않고 다양한 운동을 해왔다. 결국 자전거도 배웠고 수영도 할 수 있고 심지어 태권도 4품 유단자이다. 그리고 몸 쓰는 걸 즐거워한다.

즐기는 자를 이길 수는 없다고 했다.

이 하찮은 유전자의 이기심의 끝엔 대를 거쳐 소멸해 버리고 마는 어리석음만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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