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남편에게 씹고 뜯긴 대상을 꼽아보면 죄 직장상사들이었는데 그날은 웬일로 부하 직원에게 맘이 상해서 돌아왔다.
들어보니 그동안 알게 모르게 아래 직원 일을 거들어줬는데 어느 순간부터 아예 그 일 담당자가 자신이 돼있더라는 말이었다. 뭐, 까짓 거 내가 해주지 하는 마음으로 눈 딱 감고 여태 지냈는데 얼마 전부터 현장에 변수가 생겨서 감당하기 벅찰 만큼 자기 일이 많아진 것이 문제였다. 입술이 부르틀 정도로 일에 치여도 누구 하나 자기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는 거다. 꼰대 같은 상사들이랑 싸워 대서 그렇지 일 많다고 엄살 피우는 사람이 아닌데 돌아가는 사정이 여간 팍팍한 게 아닌 듯하다.
“사람들이 어떻게 다들 그러냐.”
“여보, 사람이니까 그렇지.”
“심지어 며칠 전에 연차를 썼어. 연휴 붙여서 10일이 넘어. 적당히 해야 되는 거 아냐? 지금 현장에 불난 거 모르나?”
닭볶음탕이 지옥 탕처럼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남편의 속을 들여다보니 무리한 일보다 직원의 무리한 연차 휴가가 더 못마땅한 듯했다.
“누군들 그렇게 안 쉬고 싶냐고. 비상상황인 거 뻔히 알면서 나 몰라라, 개인사정 먼저인 것도 정도껏이어야지.”
“그럴 거면 프리랜서 해야지.”
국물과 같이 끓고 있는 남편 마음을 한 국자 떠서 그릇에 담아 건넸다.
“그런데 며칠이 적당한데? 3일? 4일은 좀 그렇고, 5일은 심해?”
“정해진 건 없지.”
“그럼 경우가 없는 거지 꼬집어 말해서 규칙을 어긴 건 아니네.”
“그래서 딱히 뭐라 하지도 못해.”
며칠 째 이어진 야근에 심신이 갈리어 파김치가 되어 퇴근하는 사람과 일과 함께 눈치까지 내팽개치고 해외여행을 갈 수 있는 사람 중 누가 더 직장생활을 잘하는 사람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솔직하게 힘들다고 말해. 일을 좀 나눠서 하자고.”
이 대목에서 남편이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저 말을 못 할 거란 걸 알고 한 소리다. 말이 쉬웠으면 이렇게 속이 상하지 않았을 거다.
“여보, 내가 민기 말귀 트이자 마자부터 지금까지 줄곧 하는 소리가 뭔지 알아?”
“뭔데?”
“너무 착하게 굴지 말라는 거야. 감당할 수 없는 선까지 착하게 구는 건 자기 자신한테도 나쁘고 결국 상대방에게도 나쁘게 되니까, 네가 내키는 데까지만 착하게 행동하라고 얘기해 줬어.”
“흐음......”
남편이 앓는 소리를 냈다.
“당신, 착한 상사 콤플렉스 같아.”
“그럴지도.”
“왜, 꼰대소리 들을까 봐?”
“하핫. 그럴지도.”
정곡을 찔렸는지 남편은 멋쩍게 웃으며 소주를 털어 넣었다.
윗사람들에게 하도 대들고 싸우다 질려서 자기는 아랫사람에게 절대로 잘해주겠다고 마음을 먹었는지 모르겠지만 안타깝게도 생색낼 줄 모르는 사람의 배려는 고맙다는 말은 고사하고 그저 넙죽넙죽 받아먹으면 그만인 취급을 받기 쉽다.
이보다 근본적인 문제점은 아직도 남편의 직장 카테고리 안에 의리와 낭만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눈엣가시 같은 저 잡풀들을 핀셋으로 뽑아내버리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지난주에 있었던 저 사건은 바쁜 일에 눙쳐져 흔적도 없이 뭉개지고 현장은 평소처럼 어김없이 굴러갔다.
그런 중에 오늘 저녁밥상에서 남편이 새로운 소식을 전했다.
“나, 회사에서 상 준대. 우수 사원.”
“이야, 그렇게 부려먹더니 고생하는 건 알았나 보네.”
“보너스 나온대, 백만 원.”
“잘리진 않겠네. 우수 사원을 자를 수는 없잖아.”
축하와 농담이 섞인 다발을 건네고 둘이서 웃었다.
실은 남편이 정년까지 일하지 않고 최대한 빨리 은퇴하는 것이 내 꿈이다. 책임감 강한 남편은 내 잔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지만.
백만 원이라는 어쭙잖은 미끼에 코가 꿰여 우수 사원으로 도마 위에 올라 배가 갈릴 때까지 기다릴 순 없다. 값없는 배려를 여기저기 기부하다 몸과 마음이 파산하는 것도 싫다. 구시대 유물 같은 우수 사원 쪼가리를 흔들며 남편 옆에서 휘적거리는 자본주의 유령에게 충청도식 빤치를 한 방 날리고 싶다.
여보, 부탁인데 새해를 맞아 앞으로는 좀 치사해져 보는 게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