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루메 (1)

by 하유미



스루메...... 이야기 제목이 내 눈을 오래 잡아끌었다.

그 말은 나에게 들러붙어서 완전히 잊고 있었던 할머니에게로 나를 데려갔다.



아이 미술수업을 들여보내 놓고 기다리며 휴게실에서 읽은 책이었다. 구로야나기 테츠코의 ‘어릴 적에 두고 온 것들’이란 책인데 세계 2차 대전 당시 일본 사회를 어린아이의 눈으로 그려낸 이야기들이 인상적이었다. 전쟁 막바지 역은 징집되어 떠나는 군인들을 배웅하는 이들로 붐볐고 그 사이에 끼어 일장기를 흔들고 만세를 외치고 있으면 잘게 찢은 말린 오징어, 스루메 한 조각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극도로 어려운 시절에 맛봤던 간식은 작가에게 세상에 없는 맛있는 맛으로 기억된다고 했다.

문득 어릴 적 할머니가 해 주신 ‘수루메’맛이 떠올랐다.



명절날 할머니 댁에 가면 꾸덕하게 말려서 삶은 문어가 꼭 있었다. 할머니는 그걸 ‘수루메’라 하셨는데 이 책을 읽고 그게 말린 오징어를 뜻하는 일본말이며 정확한 발음은 ‘스루메’라는 걸 알게 됐다. 차례가 끝나면 할머니는 차례 상에 있는 음식 중 가장 먼저 문어 다리를 한 짝 씩 잘라서 나와 동생에게 주셨는데 사실 말린 문어다리는 맨입에 먹기에는 좀 짜서 어린 우리들 입맛에는 별로였다.



우리가 가장 기다렸던 명절 음식은 강정이다. 엄마가 마당 한쪽에 놓인 화덕에 큰 솥을 걸면 강정 만들기가 시작된다. 음식 준비를 하느라 부엌 안팎을 바쁘게 오가던 엄마가 화덕에 불을 붙이면 기다리다 지친 동생과 나는 그제서야 신이나기 시작했다. 맛도 맛이지만 강정 만드는 걸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먼저 엄마가 솥에 물엿을 한가득 부어 끓인다. 물엿이 팔팔 끓어오르면 앞 장날에 튀겨 놓은 쌀 튀밥과 볶은 땅콩을 쏟아붓고 재빨리 휘젓는다. 한 덩어리로 잘 엉기면 그걸 준비된 나무판 위에 붓는다. 그다음부턴 할머니 차례다. 할머니는 물엿 범벅이 된 알갱이들을 밀대로 판판하게 밀어준다. 이때 강정 두께를 고려해서 미는 힘을 잘 조절해야 한다. 알갱이 사이에 적당한 공극이 있어야 식감이 좋기 때문이다. 이제 한 김 식혀 칼로 반듯하게 자르면 완성이다. 채 다 굳기 전 말랑하고 쫀득한 강정을 먹을 때가 우리가 명절날 가장 기다리던 순간이다.



할머니가 계셨던 명절날을 생각하니 할머니에 대한 여러 가지 기억이 줄줄이 떠오른다. 할머니는 젊어서부터 검은 머리카락 한 올 없는 완전한 백발이셨는데 항상 머리를 검게 염색하는 일을 필두로 명절 준비를 시작하셨다. 일찌감치 허리가 굽으신 바람에 내가 기억하는 한 할머니는 평생을 구부정한 허리로 다니셨다. 열 걸음에 한번 꼴로 허리를 펴야 해서 할머니의 걸음은 느렸고 지켜보는 사람이 다 힘들게 느껴졌다. 일생동안 굽어 있던 할머니의 허리는 말년에 병석에 누워서야 펴질 수 있었다. 그렇지만 막상 펴진 허리로는 걸으실 수가 없었다.



우리는 할머니와 따로 읍에 살았다.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할머니는 읍에 나오셔서 장을 보신 뒤 우리 집에 들르시곤 했다. 그때마다 모양도 맛도 다 다른 엿 한 봉지를 사 가지고 오셨는데 엄마는 항상 그걸 냉장고에 넣어서 차갑게 해 두었다. 학교 마치고 집에 들어설 때 할머니 신발이 보이면 나는 냉장고 문부터 열어젖히기 바빴다.



할머니가 해주신 음식 중 지금도 그 맛이 기억나는 게 있는데 바로 계란 후라이다. 엄마는 젊어서 오랫동안 허리 통증에 시달리다가 내가 중학생 때 수술을 했다. 엄마가 병원에 며칠 입원해 있는 동안 동생과 나는 할머니 댁에서 지냈다. 할머니는 아침마다 계란 후라이를 해주셨는데 미원을 듬뿍 쳐서 달금하면서 감칠맛이 났다. 엄마는 요리할 때 조미료를 전혀 쓰지 않았기 때문에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런 맛의 계란 후라이는 먹어 본 적이 없어서 그 맛이 더욱 오래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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