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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유미 Jul 12. 2024

모래의 여자



“어디까지 진행됐어?”

“이제 막 실험체 3을 구덩이에 빠뜨렸어.”

“이번엔 성공해야 할 텐데. 조심히 다뤄. 저번처럼 아무 결과도 못 얻고 죽어버리면 곤란하니까.”


A는 지난번 실험체 2를 하필 태풍이 부는 날 모래구덩이에 넣어 제대로 된 관찰을 해보기도 전에 사망케  I의 주의부족을 상기시켰다.


“걱정 마. 이번엔 초기 설정값을 꽤나 세심하게 입력했으니까. 니키 준페이. 31세. 남자. 교사. 책임의 성가심과 일상의 무의미함으로부터의 탈출을 주제로 했어.”

“주제가 괜찮은데. 한몫 챙겨볼 심산이던 엽서장이 보단 확실히 낫겠는걸.”

“게다가 이번엔 실험을 촉진시켜 줄 대조군 실험체도 준비했어. 강한 생명력과 원시성의 여자.”

“확실히 대조적이네. 흥미롭겠는걸.”


A와 I는 인간의 죽음을 이해하는 일을 수행 중이다. 인간이 죽음을 선고받고 이를 인지하기까지의 다섯 단계에 걸친 각 과정을 면밀히 살펴보는 실험을 하고 있다. 앞서 두 번의 실패 뒤 이번이 세 번째 실험이다.


“이러면 어때? 남녀가 고립돼 함께 있으니 생식활동이 불가결할 테고, 둘에게 서로 다른 본능값을 주는 건?”

“어떻게?”

“여자에게는 곤충처럼 강한 번식의 욕구를 주고 남자에게는 에로티시즘을 살짝 넣는 거지.”

“순수한 자연적 성과 불순한 사회적 성이라. 좋아. 괜찮은 추가 실험이 되겠군.”


둘은 이 추가 설정값이 불러올 나비효과는 예견하지 못한 채 실험준비를 마쳤다.


실험 1단계 : 부정

실험체 3이 아주 빠르게 반응을 보임.

틀림없이 무슨 오해다, 오해가 있는 것이다.

비고 : 대조군의 성적 유혹에 거부감. 위험을 감지한 듯 보임. 곤충의 생식에서 수컷은 암컷에게 잡아먹힘. 실험체 3이 곤충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짐.


실험 2단계 : 분노

첫 번째 탈출 시도 : 꾀병. 실패.

두 번째 탈출 시도 : 인질극. 실패. 극렬한 분노 상태 지속됨.


실험 3단계 : 타협

순조로운 회유를 위해 담배와 술 배급. 동시에 물 공급 중단시킴. 극한의 생존위기에서 정신적 타협을 시도함. 마침내 부삽을 듦.

할 수 없지, 져 주지.

비고 : 집을 부수려는 남자와 대항하는 여자. 성교.


실험 4단계 : 우울-실험 일시 중단

순조롭게 진행되던 실험이 4단계에 들어서서 정체되었다. 관찰 기록을 맡았던 I가 A를 호출했다.


“무슨 일이야?”

“이제 4단계로 진입을 해야 하는데 확실한 징후를 안 보여. 뭐랄까, 좀.”

“어떤데?”

“막상 모래 퍼는 일을 시작하고는 생각보다 저항감이 크지 않아. 가끔 황량한 벌판에 서 있는 고목 같은 모습일 때는 우울단계에 진입해 보이기도 하고.”

“애매하네.”

“막 실험체 3의 눈이 새처럼 날아오른다는 정보가 들어와서 분석 중이야.”

“그런 실험 결과값을 본 적이 있어. 스스로를 조감하는 행동은 자아의 부정적인 면을 깨닫는 행동이야. 이를테면 하찮음이나 우울 따위?”

“그렇지. 그런데 이상한 노래를 부른단 말이지.”

“무슨 노래?”

“got a one way ticket to the blues, 이 노래를 a retern ticket으로 바꿔 부른단 말이야. 왜 자꾸 그러는지 이것도 분석 프로그램에 넣어봐야겠어.”

“왕복표라. 어째 느낌이 별로인데.”


실험 5단계 : 수용-실험 중단

계획대로라면 실험체 3은 자신의 죽음을 인지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단계에 도달했다. 그런데.


“탈출에 성공했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 노래를 불러댈 때 불길하다했어. 희망을 놓지 않았던 거야.”

“어쩌지? 성공이 바로 코앞인데 이렇게 실험을 망칠 순 없어.”

“더한 죽음의 공포 속으로 몰아넣자.”


그들은 실험체 3의 탈출로에 사람 잡아먹는 모래, 일명 소금밭을 만들었다. 여지없이 그곳에 빠진 생쥐는 완전한 패배를 인정했다.

살려 줘! 판으로 찍어낸 싸구려 과자 신세라도 좋으니, 아무튼 살고 싶다!


마을사람들이 그를 파내어 다시 여자가 있는 모래 구멍 속으로 내려보냈다.

밤이면 어김없이 모래를 퍼내야 하는 구멍 속의 생활이 이어졌다.

어느 날 남자는 여자에게 화분을 사자고 제안했다. 도망치고 싶어도, 가지와 연결되어 있어 도망치지 못하고 팔랑팔랑 몸부림치는 잎사귀의 무리......

여자는 라디오와 거울을 갖고 싶다고 했다.

전부 정착과 일상의 물건들이다. 좋은 징후이다.

마침내 실험체 3이 체념한 듯 보이자 둘은 성공을 예감하며 흥분했다.


실험 관찰이 끊긴 시점에, 어느 날 남자는 까마귀를 잡을 덫을 놓았다. 기대했던 까마귀를 잡지는 못했지만 엉뚱하게 덫이 유수장치가 될 수 있다는 걸 발견했다. 물은 모래 구덩이에서 탈출시켜 줄 중요한 무기가 될 수 있다. 그는 희망을 손에 넣었다.

딱히 서둘러 도망칠 필요는 없다.

관찰자 둘은 전혀 이 사실을 몰랐다.


실험 결과 보고서를 작성하는데 열중하고 있던 A에게 문득 생각이 떠오른 I가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응? 뭐?”

“이건 죽음을 수용하는 단계에 관한 거잖아.”

“그렇지. 우리가 몇 달간 공들인 결과지.”

“그럼 마지막 단계에서 죽어야 하는 거 아냐?”


A는 갑자기 혼란스러웠다. I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엄연히 말해서 남자는 죽음을 수용한 게 아니라 모래의 삶을 받아들인 것처럼 보인다. A는 서둘러 지난 데이터를 복기해 보았다.

‘없다고 곤란해질 일은 전혀 없다. 하기야 없어서는 안 될 것들뿐이라면, 현실은 슬쩍 손도 댈 수 없는 위험한 유리 세공품이 되어버린다……. 요컨대 일상이란 그런 것이다......’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데이터 하나가 깜빡거리며 걸렸다. 남자는 현대인의 무명의 삶이 실종상태와 다를 바 없음을 깨달았을 수 있다. 그렇다면 남자가 모래의 삶을 살지 못할 이유가 사라진다.

A는 손에 들린 프로그램 분석 결과지를 비틀어 꼬아 구멍 속이 뒤집어져 구멍 밖으로 이어지는 뫼비우스의 띠를 만들었다.


A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굴러갔다. 지나쳤던 또 다른 데이터 하나를 복기했다.

“납득이 안 갔어…… 어차피 인생이란 일일이 납득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지만, 저 생활과 이 생활이 있는데, 저쪽이 조금 낫게 보이기도 하고…… 이대로 살아간다면, 그래서 어쩔 거냐는 생각이 가장 견딜 수 없어……. 어떤 생활이든 해답이야 없을 게 뻔하지만…… 뭐 조금이라도 마음을 달래 줄 수 있는 것이 많은 쪽이 왠지 좋을 듯한 기분이 들거든......”

A가 쳤던 장면들이 오류 데이터처럼 튀어나왔다.
간과했었던 나비효과의 후폭풍이 된 이쪽의 모래의 여자. 처음으로 삶의 통제권을 획득하게 해 준 유수 장치.


“어떡하지? 실험은?”


I가 결정을 내리지 못해 우물쭈물하는 동안 A는 부조리의 뜻을 불러왔다.

부조리, 인생에서 그 의의를 발견할 가망이 없음을 이르는 말.


“데이터를 다 폐기해야 하나? 우리 실패한 걸까?”

“실험 제목을 바꾸자.”

“제목을?”

“인간이 죽음을 수용하는 5단계가 아니라, 부조리한 삶을 수용하는 5단계로.”


잠시 생각에 잠겼던 I가 긍정의 표시를 보냈다.


인간이 부조리한 삶을 수용하는 5단계에 관한 실험 : 남자의 손에 쥐어진 왕복표는 목적지도 돌아갈 곳도 마음대로 써넣을 수 있는 공백이다. 실험체 3은 삶의 통제권을 찾으며 진정한 자유를 손에 넣었다. 실험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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