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을 앞두고 친정 부모님과 점심을 먹으러 집에 갔다. 아빠는 거실 한복판에 서서 종편 TV 뉴스를 시청 중이었다. 화면에 한덕수가 대선 출마 관련 인터뷰를 하는 영상이 나왔다. 귀가 조금 어두워진 아빠는 소리를 키워 경청을 했다. 저런 흰소리를 진지하게 대접하고 있는 아빠의 뒷모습이 영락없이 노인 같았다.
아빠가 저렇게 늙었었나.
뉴스는 다음으로 넘어가 조희대대법원장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때까지 뉴스에 집중하고 있던 아빠가 탄식을 했다.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대법원장이 내린 판결을!”
우리 눈치를 보며 엄마가 정치 이야기 그만 하라며 말허리를 싹둑 잘라버려 아빠의 뒷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잘린 아빠의 말에 속말을 이었다.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대법원장이 법을 자기 멋대로 휘둘러 막무가내 판결을 내릴 수 있단 말인가요.’
거스를 수 없는 섭리인 걸 뻔히 알지만 자식들은 부모님의 몸이 늙고 노쇠해지는 걸 지켜보기가 안타깝다. 그보다 내게 더 안타까운 건 세상에서 도태되고 있는 부모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단순히 키오스크 사용을 못한다거나 하는 따위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AI출현이 모든 패러다임을 삼켜버린 불확실성의 시대에 지식의 유통기한은 분초단위로 짧아지고 진실은 바닷가에서 바늘을 찾는 노력을 하는 자만이 획득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과거 내가 쌓은 지식은 쓸모없게 되었고, 모든 언론과 전문가는 자기 이익에 부합한 사실만을 포장해서 진실 돼 보이게 만든다.
타성에 젖은 부모님은 점점 더 세상의 가장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공교롭게도 부모님의 인생이 늙어가고 있는 만큼씩 내 아이는 점점 세상의 중심으로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세상의 울타리인 민주주의란 놈은 태생이 공평해 노인이라고 공경하지도 젊은이라고 차별하지도 않는다. 세상에 던질 도자기 파편을 시민 한 명에게 딱 한 개씩만 쥐어준단 말이지. 여기에서 나의 고민이 생겨난다.
이제 내란은 법에서 정치의 영역으로 넘어왔다. 법의 시간이 지지부진하게 흘러가는 동안 부모님의 태도도 점차 원상복귀 중이다. 세상에 뭐 이런 일이 있냐는 말은 은근슬쩍 세상에 뭐 그런 거로라는 말로 변모하고 있다. 저 두 표를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어버이날 아침 고심 끝에 선물을 드리기로 결심했다. 아빠에게는 세상을 들을 보청기가, 엄마에게는 진실을 볼 돋보기가 되는 선물이기를 바라며. 사랑을 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