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시작한 서양미술사 수업 첫 시간,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란 주제로 두 개의 초상화를 비교했다. 루벤스의 아들 초상화와 뒤러의 어머니 초상. 각각 천진무구한 생명력과 수명이 사그라지는 때를 그린 대조적인 느낌의 두 그림이었다. 뒤러는 뼈와 가죽만 남은 어머니를 묘사하는데 잔주름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았다. 죽음에 임박한 얼굴을 왜 이렇게까지 사실적으로 그렸을까, 뒤러는. 사랑했던 것이다. 어떤 모습의 어머니라도 변함없이 사랑하는 마음을 녹인 그림의 아름다움은 결코 루벤스에 못지않았다.
한때 그런 사랑을 나도 받아보았다. 가끔씩 아이가 그려준 내 얼굴은 어떤 색안경도 치장도 거치지 않았다. 점투성이, 산발한 머리, 비대칭 주걱턱까지 세심한 묘사는 뒤러에 뒤지지 않았다. 나, 사랑받았구나. 그때는 내가 아름다움을 보는 눈이 편협해 그리는 이의 의도를 곡해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야 작가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다음 피카소의 그림으로 넘어갔다.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수탉의 모습이 어찌나 힘이 넘치는지 울음소리가 들리는 착각마저 든다. 수탉의 공격적인 특징을 잘 잡아낸 멋진 캐리커처 같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생각해 보니 아이는 일찌감치 엄마 아빠의 캐리커처도 그려냈다. 그걸 처음 봤을 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는 우리에게서 어떤 인상을 받고 포착했던 걸까. 그림을 보고 우리는 어쩔 줄 몰라 그저 수많은 머리털과 수염을 한 올 한 올 그린 끈기를 높이 사자고 합의했었다.
‘일종의 풍자라고 볼 수 있죠.’ 선생님 말씀에 갑자기 혼란에 빠진다.
편견 없는 아름다움과 풍자 사이에서 나는 지독한 사랑을 받았던 것이 분명하다.
극사실주의 묘사에서부터 캐리커처까지 장르를 넘나들며 솜씨를 뽐내던 아이는 9, 10세에 커리어 하이를 찍고 쇠퇴기에 들어갔다. 며칠 전 사진 찍어 보낸 그림은 평소 재기 넘치던 작가의 화풍을 크게 벗어난 데다 작품 해석마저 불가능한 낙서에 불과해 보였다.
다섯 살에 쿠사마야요이의 설치미술을 보며 '물고기가 뜯어먹어서 화난 물풀' 같다며 인상 깊은 비평을 남겼던 그는 도대체 어느 세계로 사라져 버렸단 말인가. 돌아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