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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울 좋은 고객

by 하유미



택배상자를 열어보고 충격을 먹었다. 돌아온 가방은 본체가 상해 있었다. 어쩐지 박스 겉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는데 가방이 포장된 상태를 보니 무성의함이 곳곳에 묻어났다.

일이 잘 안 되려면 첫 단추부터 말썽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수선을 맡기던 날 일이 꼬일 징조를 진즉에 눈치채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가방손잡이 칠이 벗겨져 수선을 맡기러 원래 구매를 했던 백화점을 갔는데 브랜드 매장이 철수를 해버려서 허탕을 쳤다. 부랴부랴 검색을 해서 대구에 딱 한 군데 남아있는 오프라인 매장을 어렵게 찾아갔다. 워낙 물건을 바꾸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그때는 고칠 수 있다는 사실에 마냥 기뻤는데 이렇게 되고 보니 그냥 새로 하나 사라고 남편이 불평을 할 때 그 말을 들을 걸 싶다.


채팅창을 통해 서비스센터 담당자와 설전이 오갔다.

Q : 검수를 하고도 고객에게 이런 상태로 물건을 태연히 보낼 수 있음?

A : 우리 잘못 아님. 낡아서 그래.

Q : 병원에 멀쩡히 걸어서 들어갔는데 죽어서 나온 꼴이야. 손잡이 말고 다른 부분을 손대지 않았다는 걸 어떻게 확신해?

A : CCTV.


보내 준 사진을 보자 본체에서 손잡이를 분리해 낼 때 무리가 갔을 거라는 심증에 더 확신이 갔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평생 자신이 이런 불상사 앞에 권리나 배상 따위를 입에 올리지 못하는 고객이란 걸 잘 알아서 그렇다.

거실에 덩그러니 놓인 가방을 쳐다보다가 앞일이 너무 뻔히 그려지니까 말도 못 하게 속이 상했다. 밖에서 얻어터지고 와도 분풀이도 제대로 못해주는 호구주인을 만난 가방에게 미안해지기까지 했다.

이 나이쯤 되면 송충이가 갑자기 갈잎을 먹으면 탈이 난다는 걸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사람은 생긴 데로 살아야 편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마무리를 할 수 밖에.


‘누구의 고의도 없는 사고라고 이해하겠습니다. 운이 나쁜 경우도 있으니까요. 소비자 입장에서 한 가지, 가방을 수령 후 수선 진행에 대한 안내를 해주지 않은 것과 수리 후 검수를 꼼꼼히 하지 않은 부분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수리비 일부 환불은 받지 않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 일로 시스템이 조금이라도 개선되어서 다른 소비자가 혜택을 보길 바라겠습니다. 그 마음 변치 않고 더 나은 서비스를 해나가시길 바랍니다.’


서비스센터로부터 진심 어린 사과와 회사의 전반적인 시스템을 개선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감사인사를 받았다.

허울 좋은 고객은 구질구질하게 미련이 남아 궁상맞은 이별의 아픔을 마저 전했다.


‘솔직히 가방을 하나 새로 사는 게 쉽습니다. 어렵고 번거롭게 수선을 하는 건 거기에 추억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고객의 그런 마음을 이해해 주면 좋겠습니다.’


마치 브랜드 컨설턴트가 된 것처럼 속 편한 소리나 하고 있는 신세를 한탄하며 가방을 장롱 속에 집어넣었다.

생뚱맞게 아이 학교 벽에 걸려 있는 액자 속 글귀가 떠올랐다.

‘내가 뿌린 씨앗 남이 거둬도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이 되자.’

지혜학교의 철학을 몸소 실천해내고 있는 명실상부 지혜학부모다운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이 수확이라면 수확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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