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물리학의 양대 산맥인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에 관한 글을 접할 때면 읽을 때마다 새롭게 감탄하게 된다. 그전보다 자신의 이해도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알아듣지 못하는 속사정과 상관없이 두 이론은 마치 거대한 자연 앞에서 압도될 때와 비슷한 감정이 들게 한다. 예술작품을 잘 해석하지 못한다고 해서 자체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데 지장이 없듯이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은 그저 경이롭다.
그리고 이 두 거장이 거시세계와 미시세계를 넘어 일상세계에까지 영향력을 미친다는 걸 알아채가는 요즘, 나의 현대물리학에의 이해도는 최고조에 달했다고 볼 수 있겠다.
저녁을 먹으러 나가기로 약속한 시간이 30분이 넘어가자 아까부터 시계만 쫓던 남편의 눈빛이 안절부절못했다. 아이 방에서는 아직도 게임에 몰두한 소리가 들려왔다.
“저녁 외식 취소야.”
일방적으로 통보를 날리고 남편은 말릴 새도 없이 주방으로 가서 프라이팬과 싸울 태세로 밥을 볶기 시작했다. 부자연스럽게 오르내리는 남편의 등에서 김이 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남편이 식탁에 앉는 것도 거부하고 거실에서 밥 먹기 시위를 거의 마쳤을 즈음 아이가 등장했다. 대번에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지만 그것과 외식이 취소된 일과의 연관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아이는 ‘아니, 왜’라고 짧은 탄식을 하고는 김치볶음밥에 계란 프라이를 두 개 더 추가해서 식탁에 앉았다.
날선 공기를 마신 소화기관이 파업을 해버린 상황에서 용을 쓰고 밥을 먹다 탈이 난 게 불과 얼마 전이라 나는 식사를 포기했다. 아이에게 밥을 차려주고 호르몬 스파이크로 땀을 뻘뻘 흘리며 어쩔 줄 몰라하는 남편을 데리고 집밖으로 나왔다.
“자식, 너무해.”
“그래도 가려고 했잖아.”
“30분이나 기다렸어.”
“여보, 고작 30분인 거야.”
아이의 별거 아닌 30분은 남편에게 1800초 동안 매초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30 단위와 1800 단위의 체감시간의 차이만큼 둘은 멀어져 갔다. 두 사람에게 시간은 상대적으로 흘렀던 것이다.
사춘기 아이의 세계는 양자역학의 영향아래 있는 것이 확실해 보인다. 불확실한 중첩의 세계이자 동시에 열린 가능성의 세계에 있는 아이를 지켜보는 데는 엄청난 상상력과 끈기를 필요로 한다. 매의 눈으로 측정을 하려는 순간 귀신같이 상태를 바꾸기 때문이다.
입력값과 출력값이 분명한 함수적 인간인 남편의 눈으로 확률적 인간을 측정해 도식화하려는 것은 모든 물리법칙을 뒤엎는 일이다.
양자컴퓨터 전문가의 말을 적용해 보자면 아이는 많은 가능성의 중첩상태에 있고 미래가 결정되지 않았기에 희망적이다.
패러다임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뀔 테고 남편과 나는 때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 집에서 과학혁명이 일어날 때를.
이 글을 읽고 선생님 한 분께서 이런 답글을 해주셨다.
'천동설이 아니라 지동설로 우주를 봤을 때, 당시 이해되지 않았던 수많은 문제들이 저절로 풀렸습니다. 아이가 변하길 기대하기보다 유미님의 마음에 혁명을 일으키세요.'
그렇다! 혁명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일으키는 것이다.
삶의 중요한 비밀을 전해주신 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