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 타기에 맞먹을 나의 또 다른 고질병은 아침잠이다. 학원 강사로 바쁘게 일하던 시절, 오후 출근 하나만으로 힘든 상황이 상쇄될 만큼 아침잠이 보장된다는 건 큰 메리트였다.
엄마는 머리만 대면 어디서든 3초 안에 잠드는 특기가 있었는데 기막힌 모계유전자의 수혜를 받은 내게 잠은 늘 차고 넘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불면증이라니.
어린 시절엔 잠 못 드는 밤이 좋았다. 나의 에고는 낮 시간에 존재하지 않았다. 학교와 직장은 에고의 감옥 같았다. 진정한 자유는 어둠과 함께 찾아왔다. 깊은 밤은 해와 함께 잠들어있던 에고를 흔들어 깨우고 어린 에고는 우수와 애수 사이를 끊임없이 방황했다. 그 울렁이는 시간 동안 라디오와 책 사이에 사색의 떨림을 채워 켜켜이 쌓아 성을 만들었다.
후에 긴 시간 견고하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나의 성은 출산이란 포탄 한 방에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리며 그것이 얼마나 허상이었는지 실체를 드러냈다. 밤공기로 빚은 에고는 현실의 햇빛에 구워야 단단해진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한 여름밤의 꿈같은 때를 지나 이제 잠은 양과 질 양쪽으로 다 부족해졌다. 잠이 든 날도 잠을 못 이룬 날도 누워서 더 버틸 수 없어 시계를 보면 어김없이 새벽 서너 시경이다. 가끔 한두 시경인 날은 그야말로 절망이다. 그때부터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은 아침을 기다리며 하릴없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 게으른 아침을 열렬히 사랑했던 시절은 막을 내린 지 오래다.
나보다 먼저 불면의 세계로 들어간 남편은 멜라토닌을 먹기 시작했다. 남편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보조제 없이 버텨보려 하지만 일상의 질이 급격히 떨어지는 게 느껴진다. 힘차게 아침을 시작해 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이 안 난다. 밤새 충전을 해봐도 완충이 불가능한 영락없이 수명이 다한 배터리 신세이다.
낮엔 대체로 멍하다. 머리에 양동이를 덮어쓰고 있는 것처럼 모든 일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조금만 배가 불러도 식곤증이 쏟아져 쪽잠에 빠지기 일쑤다. 그러니 본격적으로 잠을 자야 하는 시간에 정신이 도리어 또렷해진다. 불면은 뫼비우스의 띠를 따라 돌며 일상을 착실하게 파괴하는 중이다.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나도 모르게 세 번이나 쪽잠이 든 날, 그날 때문이었을까.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고 소파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론형 인간답게 생각을 물고 늘어졌다. 잠을 못 드는 여러 가지 이유 중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은 멜라토닌이 부족한 것이다. 왜? 해를 안 보니까. 낮 시간 동안 활동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서이다. 잠에 관해서 평생 탁월하던 엄마는 일을 그만두고 잠을 잘 못 자게 됐다고 했다. 육체적 활동과 수면은 상관관계가 있음이 분명하다.
거기에다 식곤증에 시달리는 건 소화기관을 운동시키는데 조차 체력이 왕창 소모될 정도로 몸 상태가 엉망이라는 신호로 여겨진다. 종합해 보건대 지금의 수면이슈는 체력이슈로부터 발발된 것이 확실하다.
살려면 몸을 써야 한다.
언제나 적대감이 팽배한 공간에 또다시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 운동실에 네 발로 기어서 들어가기 전인걸 그나마 다행으로 여기기로 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심정으로 트레드밀 위에 발을 올려놓았다. 상대전적에서 절대 우위를 점하고 있는 적을 보니 붙기도 전에 주눅이 들었다. 떨어뜨리려는 자와 버티려는 자의 꼴사나운 한판 싸움이 벌어졌다.
절박함에 비해 전투는 싱겁기 그지없이 8분 만에 끝이 나고 말았다.
그날 밤 꽤 잠을 잤다.
신이 아무 조건 없이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면 무엇을 원할까? 체력.
만약 세 가지 소원을 말해보라면? 체력. 체력. 체력.
남은 수명을 깎아서라도 체력을 살 수만 있다면 사고 싶다.
그따위 꼼수가 통할 리가 없으니 절대적으로 나의 수면시간이 달리기 시간의 함숫값으로 결정되길 바랄 수밖에.
오래전 내게 ‘원하는 게 있으면 체력을 기르라’ 던 자경 작가님의 혜안에 새삼 감탄하며 숙면 기원 체력단련을 위해 오늘도 달리기에 심신을 기대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