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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유미 Jun 09. 2020

일리아스(제12권)

방벽을 둘러싸고 싸우다


 
“훗날 방벽과 호는 신들의 뜻을 거슬러 구축된 이유로 허물어진다. 프리아모스의 도시가 십 년 만에 함락되고 아르고스인들이 함선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난 뒤 말이다.
하나 지금은 튼튼하게 쌓은 방벽을 둘러싸고 전투와 함성이 활활 타올랐다.
방벽 앞에서 폴뤼다마스가 제안한다.
‘호가 깊고 그 안은 날카로운 말뚝으로 채워져 있어 말을 타고 건너가기 어려우니 말들은 호 옆에 붙들어두고 우리는 보병으로서 헥토르를 따르자.’
트로이아 군사들은 곧장 다섯 부대로 나뉘어 밀집 대열을 이루고 나아갔다.
방벽 위에서 돌덩이들이 눈송이처럼 쏟아졌다.
이때 트로이아 백성들 머리 위를 날아가는 독수리 한 마리가 있었다. 뱀을 낚아채가던 독수리가 가슴을 물려 고통을 참지 못하고 그만 뱀을 놓쳤는데 그것이 트로이아인들 한가운데 떨어졌다.
이를 신의 불길한 전조라고 본 폴뤼다마스가 헥토르에게 함선들을 둘러싸고 싸우지 말자고 주장한다. 헥토르는 한마디로 일축한다.
‘최선의 새 점은 오직 하나뿐, 조국을 위해 싸우는 것이오.’
신의 전조와 자신의 힘을 믿고 트로이아인들은 아카이오이족의 큰 방벽을 돌파하려고 기를 썼다.
이들 중 뤼키아인들의 선두에서 진격하던 사르페돈이 마침내 방벽을 허문다.
양군이 팽팽히 맞선 가운데 헥토르가 문을 부수고 처음으로 방벽을 뛰어넘었다. “
 
<독후감>
일리아스를 처음 읽지만 이 전쟁의 대충의 줄거리와 결말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막상 작가에게 스포를 당하고 나니 뭐랄까, 올 것이 왔다는 기분이었다.
제12권은 이 전쟁의 결말을 그리며 시작된다. 트로이아가 함락되고 그리스 군이 물러나고 난 뒤 아폴론과 포세이돈은 방벽을 허물기로 합의한다.
‘아폴론이 강들의 하구를 한 군데로 돌려 아흐레 동안 방벽을 향해 강물을 흘려보내니, 제우스도 쉼 없이 비를 쏟고 포세이돈은 파도를 일으켜 방벽을 송두리째 삼켜 대지를 다시 평평하게 만들었다.‘
넓은 해안은 다시 모래로 덮이고 강들은 옛 물길을 따라 유유히 흐른다.
전쟁으로 인해 도시는 폐허가 되고 사람들은 죽어 사라졌다. 인간이 만든 모든 것-스스로를 포함하여-이 파괴되고 없어진 뒤에 자연은 본래 모습을 찾는다. 살육과 광기의 순간들이 도도한 자연의 흐름으로 잊힌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어떤 의미의 전쟁이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수많은 희생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어렴풋이 그래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메로스가 이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긴 것은.
광포한 시간 속에서 인간이기를 잊지 않으려는 처절한 노력들이 있었다는 것을, 처참하게 죽어간 수많은 목숨들이 있었다는 것을, 전쟁의 한 복판에는 적과 아군의 구분도 없이 그저 살육만이 존재했다는 것을, 이 모든 것을 누군가는 잊지 않고 기억해야만 한다는 것을 호메로스는 알았던 걸 거다.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떤가. 다음 세대에 꼭  알려줘야 하는 진실들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한다.
 
아이아스가 돌덩이로 적을 치는 장면이 나온다.
그 돌덩이가 ‘요즘 사람 같으면 한창때의 젊은이라도 두 손으로 쉽게 들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 헥토르가 들어 올린 돌덩이로 말하자면 ‘요즘 사람 같으면 백성들 중에서 가장 힘센 사람 둘이 덤벼들어도 땅바닥에서 짐수레 위로 쉽게 들어 올리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설거지만 좀 많이 했다 싶어도 손마디 관절이 욱신거리는 (이런 걸 남들은 관절염이라 해서 충격받았다.) 하찮은 내 손아귀를 떠올렸다.
초등 5학년 아들에게 한 손에 제압당하는 보잘것없는 내 육신도.
여자로서 내게 로망이 있다면 힘센 여자가 돼보는 것이다.
배우 박보영이 주인공으로 나왔던 드라마 ‘힘센 여자 도봉순’을 보면서 얼마나 가슴 설렜었던가. 스스로 도봉순에 빙의해서 말이다.
헥토르에게 부탁 좀 하고 싶다.
헥토르여, 남아도는 그 힘, 내게 백분의 아니 천분의 일이라도 좀 나눠줄 수 없겠는가.
그런데 옛날 사람들도 요즘 사람이란 단어를 썼다는데서 몇 천 년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어쩐지 친근감이 느껴졌다.
요즘 애들 버릇없다는 한탄이 고대 그리스어로도 적혀 있었다 하니 나이 들어가며 꼰대가 돼가는 건 예나 지금이나 한 가지인가 보다.
애석하게도 지금 나도 그렇다.
 
[추신 : 이야기가 반환점을 돌았습니다. 혹시 저와 함께 이 이야기를 읽고 있는 독자님들이 있으시다면 그동안 수고 많으셨다고,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함께 하자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매일 한 권씩 읽고 주 5회 독후감을 쓰겠다는 애당초 불가능에 가까운 계획이 원활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제 본업(주부) 핑계를 대 봅니다. 완주의 그날을 위해 vam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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