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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유미 Jun 12. 2020

일리아스(제14권)

제우스가 속임을 당하다


 
**제11권에서 부상당한 마카온을 네스토르가 전차에 태우고 도망쳤다.
 
“마카온에게 치료를 명하고 막사 밖으로 나온 네스토르는 수치스러운 광경을 보게 된다. 아카이오이족이 트로이아인에게 쫓기고 있고 방벽도 허물어져 있었던 것이다.
다들 부상당해 각자 함선들 옆에서 올라오던 디오메데스와 오뒷세우스, 아가멤논이 네스토르와 마주쳤다.
아가멤논이 말하길 ‘네스토르여! 헥토르가 전에 함선들을 불사르고 우리들 자신을 죽이겠다고 한 말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두렵소. 밤이 되면 함선들을 모두 끌어내려 바다에 띄우고 닻을 매답시다. 파멸을 위해 달아나는 것이 붙잡히는 것보다는 낫지요.’
그러자 그를 노려보며 오뒷세우스가 비난을 퍼붓는다.
이에 디오메데스가 나서서 다독이며, 우리가 비록 부상당한 신세이지만 다시 결전장으로 나아가 다른 이들을 격려하여 싸움터로 들여보내도록 하자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 말에 복종하여 아가멤논을 앞세우고 앞으로 나아갔다.
이때 제우스는 이데 산 상상봉에 앉아 있었다.
헤라는 계략을 꾸미고, 잔뜩 치장한 뒤 아프로디테를 찾아간다. 신들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갈등을 풀어드리고자 애정과 욕망을 달라는 헤라의 말에 속아 아프로디테는 모든 것이 들어있는 띠를 풀어 헤라의 손에 쥐어 준다.
헤라는 나는 듯이 달려 렘노스에 닿았다. 이번에는 잠의 신을 만나 그에게 부탁한다. ‘내가 제우스를 껴안고 그이 곁에 눕거든 그대는 지체 없이 그의 두 눈을 잠들게 해 주오.’
전에도 한 번 헤라의 부탁을 들어주다 제우스에게 죽임을 당할 뻔했던 적이 있어 꺼려하는 그에게 헤라는 젊은 카리테스 여신들 가운데 그가 늘 원하던 파시테에를 주겠다고 맹세한 뒤 허락을 받았다.
다시 빠른 걸음으로 이데 산으로 돌아간 헤라를 제우스가 발견하게 된다.
헤라의 계략은 성공하여 그들은 잠자리에 들고 잠의 신이 제우스를 재운다.
잠의 신은 포세이돈에게 달려가 이 소식을 알리고, 포세이돈은 더욱 다나오스 백성들을 분기시킨다.
디오메데스와 오뒷세우스, 아가멤논이 부상을 무릅쓰고 몸소 그들을 정렬했다.
전사들은 무구들을 다시 갖춰 입고 나아가 무시무시하게 함성을 지르며 적에게 달려들었다.
마침내 아이아스의 손에 헥토르가 쓰러지고, 전우들이 그를 전차에 싣고 도망친다. 아르고스인들은 헥토르가 떠나는 것을 보자 전의에 넘쳐 더욱 맹렬히 트로이아인들에게 덤벼들었다.
트로이아인들은 파멸을 피할 구멍을 찾느라 두리번거려야 했다. “
 
<독후감>
위기에 대처하는 법을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을 잘 알 수 있다.
아가멤논은 실리를 추구하는 위험 회피형이다. 무모하게 싸우다 다 죽고 함선들마저 잃게 되느니 체면이고 명예고 뭐고 간에 일단은 피하고 보자는 주의다.
오뒷세우스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지략가의 면모를 보인다. 아가멤논의 도망치자는 말에 ‘닥치시오!’라고 일갈을 놓지만 그것은 그의 비겁함에 대한 비난이라기보다는 일을 그르칠 수도 있는 어리석은 행동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그 말을 듣고 그대의 분별력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소. 만일 우리가 함선들을 바다로 끌어내리면 아카이오이족은 전쟁을 막지 못하고 도망칠 구멍만 찾다가 전의를 잃고 말 테니까요!’라는 그의 대사에서 한 수 앞을 내다보는 그의 지모를 엿볼 수 있다.
여기서 지략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전술의 신, 이순신 장군이 떠올랐다.
명량해전에서 아직도 배가 열두 척이나 남아있어 죽을 맛인 사들의 사기를 단박에 올려주었던 에너지 드링크와 같은 명연설이 생각났다.

‘무릇 죽기를 각오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다.’
오뒷세우스가 후세에 태어날 동생 이순신을 알았다면 이 빼어난 말을 인용할 기회가 있었을 텐데.

오뒷세우스여, 안타깝구려.
디오메데스는 노력하는 현실가이다. 자신의 현재 상황에 집중하며 지레 미래를 점치지 않는다. 그런 그가 하는 제안은 굉장히 현실적이다. 자신들은 부상을 당해 싸울 수 없으니 멀찍이 떨어져서 뒤에 처진 채 게으름을 부리는 자들을 찾아내 다시 싸움터로 보내자는 것이다.
부상을 숨기고 최전방에 서서 계속 싸우며 혁혁한 무공을 세운 위인들을 역사 속에서 많이 봐왔다. 그러나 그리스 장수들은 그런 무모함 따위는 거부한다. 몸을 잘 쓸 수 없으니 혀로 싸우겠다는 것이다. 물론 군사들의 사기는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대장이라는 작자들이 뒷방 늙은이처럼 죄다 입만 놀리고 있는데 과연 군사들의 충성심이 올라갈까 싶다.
이 대목에서도 이순신 장군이 떠올랐다.

‘싸움이 한창 급하니 조심하여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죽음 앞에서도 승리만을 생각하는 것이 장수이거늘 부상 앞에 무릎을 꿇는 그리스 장수들 어째 시원찮다.
 
헤라가 제우스를 꼬시기 위해 치장하는 장면이 거의 한 페이지에 달한다.
고대 여신의 치장이 현대 여인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향기 그윽한 올리브유를 듬뿍 바르고 (내가 먹는 올리브유는 안 그런데), 암브로시아로 향을 더한 뒤 머리를 곱게 땋아 내리고, 갖가지 장신구를 차례로 몸에 걸친다.
내 꼬락서니가 떠올랐다.
만성 피부병으로 연고를 달고 사는 거친 피부, 아이가 어릴 때는 젖내를 지금은 밥 냄새를 향수처럼 풍기고 다니는 몸뚱이, 빗질 한 방에 우수수 뽑혀 떨어지는 퍼석한 머리카락, 걸리적거려서 하도 걸치지 않아 먼지만 쌓이던 몇 안 되는 장신구는 금값이 한창 오를 때(그게, 지금은 더 올라 약이 오르지만) 냉큼 팔아먹었다. 그나마 결혼반지를 남겼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
헤라의 정성을 보니 남편이 나를 직장동료 대하듯이 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그런 그들의 잠자리도 특별하다. 싱그럽고 부드럽게 돋아난 새 풀 매트리스에 황금 구름 이불을 덮는다. 나도 한 번쯤 누려보고 싶은 그리스산 최고급 상품이구먼.
참고로 제우스의 여성 편력이 궁금하신 분들이 있으시다면 이번 권 315행부터 325행까지 훑어보시기 바란다. 화려한 이력이 카사노바 저리 가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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