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만 길고양이

by 하유미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던 휴대폰 케이스와 포장지를 꺼내서 분리수거를 하고 나니 내 마음속이 쓰레기통이 됐다.

새로 산 휴대폰 케이스가 깨져 있었다. 구겨진 포장지에서 어제저녁 남편의 기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이는 택배 상자를 뜯고 있던 남편에게 무슨 일인지 눈치 없이 캐묻다 일찌감치 화살을 한 방 맞았다. 나까지 기분 상하고 싶지 않아서 외면하고 있다가 오늘 아침에야 쓰레기통에서 어제의 참상을 발견한 것이다.

1. 플라스틱 제품이니까 배송 과정에서 자칫 깨질 수도 있다.

2. 증거 사진을 찍고 주문처에 문의를 한다.

3. 교환 및 환불 둘 중 한 가지로 일이 해결될 것이다.

남편의 머릿속에서는 이런 논리적인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

오직 즉각적인 반응만 있을 뿐.

1. 내 물건이 깨져서 왔다.

2. 화가 난다.

아이가 얼쩡거린 관계로 화를 입었다. 아이만 아니었다면 오늘 내 마음이 쓰레기통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달리 생각해보면 아이에게 고마울 수도 있는 일이다. 또래에 비하면 자아정체성 형성시기(사춘기)가 늦어 아직은 우리에게 살가운 아이가 부모의 일을 궁금해하고 관심을 가져 주는 게 나는 참 예뻐 보이는데 말이다.

화가 난 사람에게 이런 논리적인 사고를 기대할 수 없다. 예전에는 화가 좀 누그러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을 걸면 통했는데 얼마 전부터 남편은 아예 귀가 없는 사람처럼 굴고 있다. 이러니 갱년기인가 합리적인 의심이 들 수밖에.

좀 걸어야겠다 싶어서 나갈 준비를 했다. 먹구름 사이로 햇살 한 줌 비치지 않았지만 선글라스를 챙겼다. 어지러운 내 마음이 표정으로 드러나는 게 싫었다.

새벽에 쏟아진 폭우로 보도블록 사이사이 숨어있던 이끼가 뜯겨 나와 마당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나뒹굴고 있는 이끼가 내 마음 같았다.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재생시켰다. 오늘 무슨 날인지, 내가 괜히 별것에 감정을 이입시키는 건지 노래마저 나를 쿡쿡 찌른다.

사랑은 헷갈리게 하지 않아

그게 너라면 아깝지 않아

묻고 싶어

듣고 싶어

oh if you (feel the same)

사랑은 망설이게 하지 않아

수많은 선택지 위에 너와 나

난 너만을

넌 나만을

남겨둬

그래, 사랑은 그런 거였지. 아깝지 않고 망설이게 하지 않는 것. 그런데 요즘 나는 남편을 이해하려는 내 마음이 아깝고 내 마음을 솔직하게 말하기가 망설여진다. 되로 주고 말로 당하기를 몇 번 겪고 나니 그렇다. 사랑이 오래되면 으레 동료애로 변한다고 하지만 근래 내 마음은 경로 변경 수준을 넘어 궤도를 이탈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저수지 둘레에 난 산책로를 한 바퀴 돌려고 올라가다 보니 소방서 앞 사거리 차도 한 복판에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때마침 직진 신호를 받은 승용차 한 대가 달려오는데 어쩐 일인지 꿈쩍을 않는다. 다행히 운전자가 고양이를 발견했는지 속력을 내지 않고 뭉그적대며 다가왔기에 망정이지 심히 걱정스러운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차량이 아주 가까워져서야 고양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인도로 넘어와 주차된 차들 사이로 숨어들었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털이 듬성듬성 빠져있고 남아있는 털마저 윤기를 잃어 몰골이 형편없었다. 밤새 폭우를 피하지 못했는지 젖은 털은 말라비틀어진 몸뚱이를 더 도드라져 보이게 했다. 인기척을 느끼고도 재바르게 숨지도 못하는 고양이를 보고 나니 아까 차도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던 건 우연이 아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이쪽 편으로 건너오는 중에 지쳐 중앙선에 앉아 쉬고 있었던 모양이다. 고작 사 차선 도로를 한 번에 건너갈 힘이 없어서. 평소 도도 하디 도도한 그들의 걸음걸이를 떠올리니 더욱 짠한 마음이 들었다.

고양이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생각에 빠져 걷다 보니 어느새 생각은 남편에게로 옮겨와 털 빠진 고양이에 헐빈한 머리숱의 남편이 자꾸 겹쳐졌다.

고혈압 환자가 돼버린 몸뚱아리, 어느새 꼰대 취급을 받아도 억울하지 않을 만큼 먹어버린 나이 , 눈에 띄게 사그라져가는 젊음, 코앞에 닥친 중년의 삶에의 불안감,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밥벌이의 고단함과 지겨움 등 남편의 마음을 허무하게 만드는 것들을 짐작해보았다.

속시원히 마음을 털어놓지 못하고 혼자 끙끙대면서 괜히 애꿎은 날을 세우는 건 무거운 책임감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 남편은 지금 주차된 차들 사이에 숨어들어 낡은 털을 핥으며 자기 연민에 빠져 있는 건지도 모른다.

마음 한편에서 희미하게 궤도를 수정하는 신호가 잡히는 듯했다. 사실 가타부타 말을 않으니 남편의 마음을 자세히 알 수는 없다. 내 나름으로 이해하려고 갱년기인가 넘겨짚어 보는 것일 뿐이다.

'수많은 선택지 중에 남은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묻고 들을' 의무와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남편에게 일깨워주고 싶다. 숱하게 마음을 재며 남편에게 치사하게 굴었던 자신에게도.

솔직히 남편이 스스로를 길고양이로 인식하는 것이 얼마나 부당한지 한 가지만 꼽아 보면 대번에 드러난다.

남편에게는 집과 가족이 있다.

집고양이 주제에 자꾸만 길고양이의 영혼을 빌려와 중앙선을 깔고 주저앉아 있는 이 반려자를 오늘 저녁 고기나 구워 주며 혼내줘야겠다. 아, 참 오늘 회식 이랬는데...

*노래 가사 : 마미손 '사랑은' 중 원슈타인 ver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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