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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Nov 20. 2016

밥 먹다 머리카락이 나오면

책 읽다 말고 딴생각 하기

모든 밤이 지극한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떤 밤은 너무나 지극해서 머리카락 한 올이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다. 식물의 키가 밤새 줄어드는 소리나 전깃줄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까지, 몰래 접어둔 걱정 한 덩이가 뒤척이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다. 
<박연준, 장석주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를 읽다가>



오래간만에 욕실 청소를 한 뒤 침대에 널브러져 스마트폰을 보던 남편이 내 얼굴을 보자 대뜸 머리카락이 왜 그렇게 많이 빠지냐고 물었다. 안방 욕실에서 이유미 한 마리(?)가 나왔다며, 내가 우리 집 고양이 때문에 청소기에 가득 찬 털을 빼낼 때마다 “봉봉이 한 마리 나왔어’라고 한 걸 따라 하는 거다. 그렇다. 나는 요즘 머리카락이 어마어마하게 빠진다. 다른 엄마들은 아이 낳고 머리카락이 많이 빠진다던데 나는 아이 낳은 직후엔 안 빠지더니 이제야 뒷북이다. 드라이기로 머리카락을 말릴 때마다 힘없는 머리카락들이 어찌나 많이 빠지는지 누가 보면 병이라도 있는 사람인 줄 알 태세다. 그렇다 보니 생전 안 쓰던 탈모 샴푸를 다 쓰고 있는 요즘인데... 머리카락 하니까 얼마 전 점심시간에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한 번은 괜찮아, 머리카락은 나도 빠지니까

점심 메뉴 선택은 늘 고민되지만 행복한 고민임이 분명하다. 일주일 내내 내가 원하는 걸 먹을 순 없지만 평일 저녁과 주말엔 주부 모드로 돌아가는 내게 다른 사람이 해준 밥을 먹는다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흔치 않기 때문이다. 회사 근처 식당이 거기서 거기일 것이다. 핫한 맛집 많은 합정동에 회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가는 곳만 가는 게 현실이다. 먹는 메뉴 또한 거의 일정한 게 반복인데, 주로 돈가스, 김치나 된장찌개, 짜장이나 짬뽕, 만둣국이나 칼국수, 순댓국, 분식 등이다. 열거해 보면 많은 것 같지만 이것도 맨날 뭐 먹을지 고민이 된다.


그날은 전날 배부르게 먹고 잤음에도 불구하고 아침부터 배가 고팠다. 오전 업무 짬짬이 친한 동료와 메신저로 점심에 뭐 먹을지를 궁리했다. 개운한 게 먹고 싶었던 나는 김치찌개를 제안했고 몇몇의 반대가 있었지만 결국 의견 일치에 성공, 회사에서 3분 거리에 있는 김치찌개 집으로 향했다. 그곳은 돼지고기 바비큐를 직접 구워 김치찌개와 함께 나오는 식당으로 그날은 함께 간 동료 모두가 처음 먹어보는 바비큐 비빔밥을 주문해 보기로 했다. 허름해 보이는 식당이지만 점심시간이면 늘 사람이 꽉 차있었다. 음식을 주문해 놓고 배고파, 배고파를 주문처럼 외우기 10여분, 드디어 비빔밥과 김치찌개가 나왔고 보글보글 끓는 찌개를 한 입 먹어보곤 맛있다 맛있다를 연신 중얼거리며 밥을 쓱쓱 비비기 시작했다. 너무 배가 고파 밥이 고추장에 다 비벼지기도 전에 한입 떠서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으며 손은 계속 밥을 비볐다. 다이어트해야 되는데, 하면서도 허기로 봉인 해제된 식욕에 손은 멈출 줄을 몰랐다.

illust by 윤지민


그렇게 밥을 다 비벼 한 수저 막 뜨려는 찰나 내 레이더에 딱 걸린 낯선 머리카락! 동료들이 밥을 맛있게 먹으며 이야기 나누는 사이 재빨리 머리카락을 빼 손에서 털어냈다. 친정에서 밥 먹거나 시댁에서 밥 먹으면 꼭 머리카락 하나씩 나오는 게 일상이라 그저 우리 엄마 머리카락 빠졌다 생각하고 그냥 먹자, 하며 다시 밥을 숟가락으로 싹싹 비벼 부서진 달걀 프라이와 함께 한 수저 뜨려는데 저 깊은 곳에서 또 하나의 머리카락이 보이는 거였다. 한숨이 푹, 하고 나왔다.(사실 그때는 조금 화가 났다) 하나 정도면 그냥 빼고 먹는데 또 나온 머리카락은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았다. 같은 메뉴를 맛있게 먹고 있는 동료들에게 미안했지만 조용히 사장님을 불렀다.


성격이 그리 모질지 못해서 머리카락 나왔다고 삿대질해가며 상을 들어 엎을 주변머리도 못되기 때문에(그럴만한 일도 아니었고) 이래이래 해서 이러이러한 상황이니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정중히 물었다. 사실 물었다기보다 머리카락이 두 번이나 나왔는데요…’하고  상황 설명을 한 게 다였다. 한 번이면 그냥 빼내고 먹으려고 했다고(사실 그래도 될 만큼 맛있었다) 근데 두 개는 좀 아닌 것 같다고…
3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사장은 당혹감을 애써 억누르며 밥을 다시 갖다 드리겠다고, 비빔밥은 시간이 좀 걸리니 그냥 맨밥을 드려도 되겠냐며 밥값은 받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의 정중한 사과보다 맛있는 비빔밥을 먹지 못하게 된 게 아쉬운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네…라고 대답했다. 그는 그 후에도 반찬을 추가로 더 갖다 주며 죄송하다 말했고 밥을 다 먹을 즈음엔 사이다 캔 2개를 가져와 다시 한번 죄송하다고 거듭 사과했다.


무엇보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때 화가 나는 법


생각해 보면 식당 사장이 연신 죄송하다고 말한 이유는, 물론 음식에서 머리카락이 나온 잘못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사자인 내가 너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실수에 대해 조금 너그러이 행동했더니 상대방이 오히려 더 미안해했다. 사람 심리라는 게 그렇지 않나? 미안함을 강요하면 반발심이 생겨 더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는 것처럼 괜찮다고 넘어가면 더 미안해 안절부절이 되는 것. 그 상황에서 내가 특별히 아량을 베푼 것이라기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에 대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 것뿐이다. 나도 음식 하는 주부고 밥할 때마다 모자 쓰고 하지 않는 이상 머리카락은 들어갈 수 있는 일이니까. 내가 잘했다기보다 나는 사람들이 조금 더 너그러워지면 좋겠다. 머리카락은 누구나 빠질 수 있는 일이니까.


우리가 무언가에 화가 나는 이유는 그 잘못됨을 인정하지 않을 때다. 비빔밥에서 나온 머리카락을 보고 이거 우리 주방 아줌마 머리카락 아니라고 하면 나는 ‘그럼 내 머리카락이란 말이에요?’라며 싸우게 될 테니까. 인정하고 돌아서는 자의 뒷모습은 아름답다고 하지 않던가? 그 상황에서 ‘아, 이 아줌마 머리카락 또 나왔네’라면서 이러니 사장인 내가 억울하고 분해서 살 수가 없다는 식으로 나오면 안 되는 거잖나. 그러니까 잘못은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반성하는 게 맞다. 반성에서 끝내기도 뭔가 아쉽다 싶으면 그 비빔밥집 사장님처럼 사이다라도 두 병 내오는 센스 정도는 땡큐고. 이런 게 상처받은 마음에 제대로 된 보상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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