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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Dec 05. 2016

마지막 한 장

책 읽다 말고 딴생각 하기

줄넘기를 시작한 지 보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줄넘기의 개수는 여전히 제자리였고 그러는 동안 나는 두 장의 달력을 찢어 냈다. 그녀를 만나지 않고도 두 달이 지난 거였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았고 나는 어두운 방에 누워 부지런히 알약을 씹었다. 달라진 건 없었다. 아니, 달라진 게 하나 있다면 밤마다 한없이 커지는 어둠 속에서 말없이 줄을 돌리는 그녀를 상상할 수 있다는 사실, 단 하나였다. 
<김혜진 ‘어비’ 중 ‘줄넘기’를 읽다가>



매일 아침 아이 어린이집 가방을 챙기며 알림장에 짧게나마 메모를 하는데 다른 날보다 월요일과 금요일은 조금 더 긴 이야기를 쓰게 된다. 내용이야 뻔하지만, 월요일의 경우 날씨 혹은 날짜 이야기를 꺼내며 이번 주도 우리 아이 잘 부탁드린다는 얘길 쓰고 금요일은 한 주도 고생 많으셨다, 주말 편히 보내시라는 등등의 내용을 적는다. 전에도 말한 적 있지만 나는 선생님과 주고받는 이 알림장이 참 좋다. 요즘은 관련 어플도 많이 나와서 우리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 일부 학부형들도 원장님께 어플을 쓰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한 것 같은데 원장님의 손글씨 사랑은 한결같으시니 나는 적극 찬성이다. 그렇게 쌓인 알림장이 벌써 세 권째다. 가방에 함께 넣은 물병에서 물이 새 젖는 바람에 너덜너덜해져 원래보다 불어난 알림장 두 권이 책꽂이에 단정히 꽂혀있다. 가끔 책을 읽다가 혹은 일기를 쓰다가 지난 알림장을 빼서 들춰보곤 하는데 감회가 새롭다. 메모뿐만 아니라 선생님이 매일 휴대폰으로 찍어서 일일이 출력해 알림장에 붙여주는 아이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입 꼬리가 올라간다. 나 없는 동안 아이가 보낸 시간들을 보는 게 짠하면서도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다행스러운 마음이 든다.


하루살이처럼 매일매일 무사하면 다행이라는 생각


오늘 아침에는 이번 주면 11월도 저무네요, 라는 말로 알림장 메모를 시작했다. 아이 반 담임 선생님은 최근 나의 당부사항(아이가 손가락을 빨지 않게 해달라는)을 얼마나 어떤 식으로 잘 지키고 있는지, 간식으론 뭘 먹었고 아이가 잘 놀았는지 등등을 꼬박꼬박 적어주신다. 오히려 부탁을 한 나는 캐어를 잘 못하는 반면 선생님은 세심하게 가르치고 계신듯했다.
2017년 달력을 주문했다. 얼마 전에는 매년 쓰고 있는 몰스킨 데일리 다이어리도 주문해 서랍에 고이 넣어놨다. 내년 달력을 챙기고 다이어리를 사는 일 등으로 한 해가 가고 있음을 몸소 느낀다. 매년 그렇지만 이쯤 되면 한 해 동안 뭘 했는지, 과연 이뤄 놓은 게 있긴 한지 되돌아보게 된다. 하루살이처럼 매일매일 무사하면 다행이란 생각으로 지내고 있는 요즘 더더욱 앞을 내다볼 수도 과거를 돌아보기도 힘들어진다.

정신없이 복직해 어영부영 보낸 작년과 달리 올해는 아이가 생겨 바뀐 생활 패턴에 나름대로 잘 적응해 나가고 있는 것 같다. ‘평일의 나’와 ‘주말의 나’가 완전히 다른 만큼 두 가지 모습(?)의 내가 적당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평일에는 엄마라는 나보단 글을 쓰고 회사를 다니는 나의 모습이 더 나다운 모습 같고 주말에는 철저히 한 아이의 엄마, 가정 주부의 모습으로 돌변한다. 가끔은 가면이라도 썼다 벗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만큼 다르다. 평일 출퇴근 시간에 주로 많은 책을 읽으며 자양분을 만들려 노력하고 되도록이면 회사에 있는 동안만큼은 아이 생각에서 나를 떨어 뜨려 놓으려 애쓴다. 반대로 주말에는 철저히 아이의 엄마로 돌아와 아들의 눈높이에서 몸으로 웃겨주고 내가 상상할 수도 없던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망가지며 놀아주려 한다. 사실 그래서 월요일이면 주말의 나에서 평일에 나로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리는 것 같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월요일인 오늘이 그렇다. 8시 출근해서 오전 내내 좀 멍~한 기분으로 분주하게 작업을 했다. 글 쓰는 직업이다 보니 반드시 워밍업, 그러니까 예열 시간이 좀 필요한데 그게 나에겐 필사(정확히는 필타가 맞겠다, 노트북으로 하니까)다. 전날 퇴근길 혹은 출근길에 읽으며 밑줄 친 문장들을 워드 작업을 통해 각각 파일로 만들어 놓는다. 생각을 쥐어짜야 나오는 글쓰기와 달리 아무 생각 없이 눈과 손가락 및 팔의 관절을 이용해 시간이 채워지고 뭔가를 남기고 있다는 뿌듯함에 정신이 충만해진다. 더불어 이 시간과 작업들이 도움닫기가 되어 실무에 힘이 실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매일 다른 텍스트를 읽고 쓰지만 결국 비슷비슷한 날들의 반복이다. 그게 싫다는 게 아니라 그러면서 하루가 일주일이 한 달이 그리고 일 년이 채워진다는 게 때로는 허탈하게 때로는 든든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게 삶이겠지.


바쁘게 보내면서도 여전히 실속 없는 내 일상


11월이 딱 3일 남았다. (이 글이 오픈되는 시점이면 이미 12월이겠다) 오늘 점심시간 동료들과 메뉴를 정하고 중국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내년 공휴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누군가는 벌써부터 내년을 이야기하냐고 했지만 누군가는 12월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곧장 5월 연휴가 닥쳐올 것 같다고 했다. 시간은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늘 빨랐다. 나는 아직도 많은 시간을 바쁘게 보내지만 여전히 실속 없이 보내기도 한다. 물 위에 뜬 기름처럼 둥둥 떠다니는 마음과 생각을 종잡을 수 없어 허송세월 보내기도 하지만 늘 어딘가에서 자극을 받고 마음을 다잡으며 2017년을 보내게 될 것이다. 매번 왜 이렇게 시간을 헛되이 보낼까 생각하지만 이제 완전히 꺾인 30대가 되고 보니 이렇게 사는 게 나다운 건가 싶은 생각도 없잖아 든다. 주문한 달력이 도착하면 내년 공휴일부터 찾아보는 짓을 또 하게 될지라도 그게 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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