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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Jan 06. 2017

나는 한국 단편소설로 산다

동시대를 사는 현대인이라면 읽어야 할 한국 단편소설집 3권

1. 아무도 아닌_황정은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왜 이렇게 참을 수 없는 일이 많아졌을까. 다른 사람들은 이런 걸 어떻게 참고 있는 걸까.”


이런 걸 기막힌 타이밍이라고 한다. 황정은 작가의 단편집 ‘아무도 아닌’을 읽게 된 계기 말이다. 1월에 함께 소개하려는 정이현 작가의 ‘상냥한 폭력의 시대’를 읽고 그에 관한 팟캐스트를 흥미롭게 듣던 중 정이현 작가가 황정은 작가의 ‘누구’라는 단편에 관한 이야길 꺼냈다. ‘누가’는 15회 이효석 문학상 수상작이다. 아직 단편으로 묶인 책이 없어 이효석 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사서 읽어봐야지 하고 있던 차에 그녀의 새 단편집 소식이 들린 것. 황정은 작가의 장편을 주로 읽었던 나로선 단편집 소식은 달콤한 설렘이었다. 그렇게 읽기 시작한 ‘아무도 아닌’을 어떻게 읽었는지 모를 만큼 단숨에 읽어버렸다. 때론 너무 아무렇지 않아서, 때론 너무 어이없이 좋아서. 따옴표 없이도 대화인 줄 알고 누가 말했다 쓰지 않아도 누가 말했는지 알 수 있는 묘하고 아름다운 문체. 삶에서 내가 놓치고 살았던, 잊고 지냈던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꺼내 툭 던져 놓듯 이야기하는 그녀의 글 솜씨에 매번 놀라면서도 계속 읽을 수 있어 행복할 따름이다. 표지 날개에 의례 있는 작가 소개에도 사진과 황정은이란 이름 석자가 전부이고 단편집이면 의례 있는 해설도 없다. 책 맨 뒤쪽에 있는 추천사도 당연히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 소설 그대로를 읽고 내 마음껏 해석하라는 작가의 배려 같다. 내게 ‘아무도 아닌’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책’이다.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데 내가 왜 누군가를 신경 써야 해? 진주요, 아줌마 딸, 그애가 누군데요? 아무도 아니고요, 나한텐 아무도 아니라고요.” (‘양의 미래’ 중에서)




2. 상냥한 폭력의 시대_정이현 


“문제가 분명해 보일 때 어떤 사람은 원인을 제거하는 쪽을 택한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은 방 안으로 조용히 숨어들어 문을 걸어 잠근다.”


정이현 작가는 제목을 참 잘 짓는다. 작가의 책은 한 권도 빠짐없이 읽은 나로선 그 센스마저 부럽다. 상냥한 폭력의 시대라는 제목처럼 우리는 미소 없이 상냥하고 서늘하게 예의 바른 시대에 살고 있다. 작가의 소설은 늘 동시대를 이야기한다. 내가 역사물보다 현대물에 치우치는 쪽이라 그런지 그녀의 소설은 그런 점에서도 늘 내 욕구를 만족시킨다. 특히 이번 책에 실린 7개의 단편 중 ‘서랍 속의 집’은 너무 내 이야기 같아서 두 번을 연달아 읽기도 했다. ‘이사’라는 소재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점에서 이건 내 이야긴데? 하는 지점이 굉장히 많았다. 부드러운 재질의 표지 안에 날카로운 속지를 감추고 있는 이 책처럼, 평온하기만 한 것 같은 아파트에 유독 한집만 밖으로 꺼내놓은 화분을 그린 표지 일러스트처럼 잔잔하기만 한데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부모를 죽이고 집안 가득 쓰레기가 쌓여가는 현실을 그려낸 ‘상냥한 폭력의 시대’ 일독을 권한다.


“어떤 사람이 제멋대로 나를 침범하고 휘젓는 것을 묵묵히 견디게 하는 건 사랑이지만, 또 그 이유로 떠나기도 하지.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미스조와 거북이와 나’ 중에서)




3. 오늘처럼 고요히_김이설


“비밀을 만드는 사람은 결국 외롭게 되어 있어.”


읽는 내내 이렇게 가슴이 저릿저릿한 소설은 오랜만이었다. 지금 떠오르는 기억으론 장강명의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과 김려령의 ‘너를 봤어’가 그랬다. 오늘처럼 고요히는 두 소설과는 다른 슬픔이 있었다. 너무 현실적이라고 해야 되나? 감정이입이 더 잘된다고 해야 되나. 아무튼 그런 면에서 가슴 아픈 단편들이었다. 읽는 내내 희미하게 빛이 든 방에 혼자 있는 것처럼 어둡다. 이런 감정이 싫다면, 지금 내 현실이 더 지옥 같다면 읽지 않는 게 좋다. 누군가의 불행 위에 집을 짓듯 덤덤히 바라볼 수 있다면 상관없다. 얼굴을 하얀 천으로 씌워 숨이 콱 막힐 것 같은 표지처럼 읽는 내내 명치가 답답하다. 때론 너무 충격적이고 너무 적나라하고 가학적이어서 그렇다. 그중 ‘아름다운 것들’을 읽을 땐 그 감정이 극에 다다라 앞 뒤를 왔다 갔다 하며 읽어야 했고 제 손으로 자식을 죽이는 부모의 심정이 오버랩되어 회사에서도 연신 눈물을 훔쳐야 했다. 작가는 ‘아름다운 것들’에 관해 두 개의 결말을 써놨다고 했다. 하나는 해피엔딩, 하나는 새드엔딩. 결국 세상 밖으로 나온 결말은 새드엔딩이었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실제로 이렇게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는 걸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현실을 반영한 결말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힘들어도 꼭 읽어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니까.


“사람은 자기 손에 없는 것만 간절히 원하기 마련이다. 대리 만족이든, 결핍에 대한 보상이든, 여하튼 공허를 잊기 위한 몸부림일 뿐이었다.” (‘복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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