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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Mar 20. 2017

발표가 두려워

책 읽다 말고 딴생각하기 

좋은 잎차를 저 티포트에 우려서 마시면 생활의 질이 올라가지 않을까. 티백을 마시는 삶과 잎차를 우려먹는 삶의 행복도에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크게 느껴졌다.
<오지은 ‘익숙한 새벽 세 시’를 읽다가>



자꾸 긴장되는 심신을 추스르려 이번에 새로 산 연잎차를 우려 마시고 있을 때였다. 테이블 맞은편에선 남편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얼마 전 회사에서 직장동료 S가 자신에게 이렇게 물었단다.


“유미 님은 집에서도 그렇게 말이 없으신가요?”


(아, 참고로 나와 남편은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고 우리 회사는 직급 없이 모두의 이름 뒤에 ‘님’을 붙인다. 처음엔 아, 뭐야 너무 어색해, 했지만 어느 순간 ‘~씨’ ‘~과장님’보다 부르기 편해졌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
“뭐… 본인 관심사엔 말이 많다고 했지.”

과연 그런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는 말이 없는 편이 맞다. 내성적인 편이라 친한 사람들 몇몇이 있는 자리에선 좀 수다스러워도 어색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끼리 있으면 줄곧 스트레스받을 정도로 두려워한다. 겉으론 최대한 티를 안 내려 노력하지만 말이다. 그나마 나이가 어느 정도 드니까 나보다 어린 친구들에게 한두 마디 정도 쉽게 건넬 수 있는 거지 그 전엔 입을 떼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이런 내가 4년을 미술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걸 생각하면 나조차도 아이러니다.)


회사에서 작년 하반기부터 준비해온 프로젝트가 있었다. 그중 한 꼭지는 오롯이 내가 준비해야 되는 거였는데, 바로 29CM의 텔링 가이드에 관한 것이었다. 즉 쇼핑몰에선 어떤 식으로 기획전 카피를 쓰고 메인 이슈를 다뤄야 하는지, 쓰지 말아야 할 말들은 무엇인지 등등을 정리했다. 그렇게 준비한 원고가 마무리되어 디자이너의 손을 통해 사내 직원들 배포용 소책자가 만들어졌다. 이걸로 끝이면 너무 홀가분하겠지만 나에겐 한 가지 해야 할 것이 남아 있었다. 바로 직원들 상대로 자료를 바탕으로 교육을 하는 거였다. 사실 교육이랄 것까지도 없다. 그저 책에 적힌 것들을 좀 풀어서 쉽게 설명해주는 정도겠다. 작년 하반기부터 이 프로젝트를 준비하며 애초에 정해놓고 시작된 거라 빼도 박도 못하고 어쨌든 내가 해야 끝나는 과제였다. 그러니까 나는 이 발표 스트레스를 작년 하반기부터 품은 채 끙끙거린 것이다.

사실 이 발표, 반년 전부터 걱정이었다


발표, 그까짓 거 그냥 하면 되지 했다만 이게 머릿속으로 생각한 거랑 직접 입을 열고 목소리를 내서 말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얘기다. 괜히 스피치 학원이 있는 게 아니다. 그 와중에 외부에서도 강의 요청이 들어왔다. 나름 이름 있는 브랜드인데, 내가 쓴 책도 읽어 보고 브런치에 연재하고 있는 ‘소설로 카피 쓰기’도 잘 보고 있다며 본사 직원들 상대로 강의를 해줄 수 없느냐는 거였다. 처음엔 거절하려고 했다. 강의를 해본 적도 없을뿐더러 내가 강의라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강의 커리큘럼도 없고 경험도 없어서 힘들 것 같다고 담당자와의 통화에서 솔직히 이야길 했더니 지금 쓰고 있는 소설로 카피 쓰기 이야기도 좋고 사물의 시선 관련 사례도 좋으니 꼭 해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그쪽 회사에선 발상의 전환 정도여도 괜찮을 것 같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나자, 어쨌거나 이렇게 첫발을 내딛게 되면 발표가 좀 쉬워지지 않을까, 그럼 내 영역이 더 넓어지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럼, 해볼게요.”

illust by 윤지민


요청 들어온 날이 강의 예정일에서 거의 한 달 반 정도 여유가 있기도 해서 해보겠다고 말은 했으나 여전히 고민이 많긴 하다. 그전에 사내 교육이 있었다. 내용이 모두 같진 않아도 어느 정도 하고 싶은 말은 같아 모든 걸 경험한다 생각하고 작업에 임하기로 했다. 예전에 회사에서 간혹 하는 PT는 시각 자료를 대강 만들고 원고도 없이 한 페이지씩 보며 떠오르는 말을 그대로 뱉어버려, 정확히 뭘 전달하려는 건지 나조차도 잘 모르겠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서 목소리는 자꾸 잠기고 갈라지고 준비가 제대로 돼있지 않으니 목소리가 거의 염소처럼 떨렸다. 뿐만 아니라 호흡 조절도 안 되고 발표 예상 시간도 알지 못해 그 발표는 실패나 다름없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밖으로 표출된 건 30%도 안 돼서 늘 아쉬움이 남았다. 이번엔 절대 그러면 안 된단 생각에 일단 방송 작가처럼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직접 말하는 것처럼 원고를 써서 달달 외우는 거다. 그렇게 맘을 먹고 원고를 쭉 써보니 A4 12장이 나왔다. 물론 중간에 호흡조절을 위해 넉넉히 행간을 띄우긴 했어도 꽤 많은 분량이었다. 하지만 한 시간 강의를 고려하면 이 정도 가지고도 부족할지 몰랐다.

1차 완성된 원고를 최종 3, 4차까지 수정을 했고 화면으로 보일 PT 또한 여러 차례 수정을 거듭했다. 어쨌거나 숨죽여 읽고 외운다고 끝이 아니었다. 실제로 말해보는 거랑 하늘과 땅 차이기 때문이다. 급한 대로 회식하고 돌아와 졸린 눈을 비비며, 그럼 시작해봐…라고 말하는 남편을 앉혀두고 PT를 시작했다. 영 어색해서 첫마디를 떼고 둘 다 웃음이 터져 내가 뭐 하는 거지 싶어 한참을 깔깔거리다가 내 이야기를 듣겠다고 모인 직원 및 외부 사람들을 떠올리자 장난이 아니란 생각에 웃음이 뚝 그쳐졌다.
역시 눈이나 머릿속으로 읽는 것과 소리 내어 읽는 건 달랐다. 이렇게 말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인위적이어서 어색했다. 이런 유머를 넣으면 빵 터지겠지 생각하고 썼는데 읽어보니 이 분위기 어쩔… 그 사이 남편이 지루한지 휴대폰을 들었다 놨다 하기에,

“아, 휴대폰 보면 어떻게 해!”라고 버럭 화를 냈더니,
“실제로 PT 할 때 휴대폰 보는 사람 얼마나 많은데, 당신도 그랬을 걸? 적응해야지.”라고 대답했다.

맞는 말이다. 그러니까 저런 관객의 반응에도 휩쓸리거나 흔들리면 안 되는 거다. 나는 다시 원고를 수정했다. 최대한 내가 꺼낼 수 있는 말을 다 적었다. 어색한 정적이 돌지 않게 자연스러움을 강조해야 했다. 그냥 하는 말 같아도 계획적이어야 했다. 서점에 들러 스피치에 관한 책, 떨지 않고 말하는 법에 관한 책을 샀다. 나는 화장도 책으로 배우는 사람이니 관련 서적은 필수다.


책을 보다가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나처럼 발표를 미리 불안해하고 걱정하는 것을 두고 ‘예기 불안’이라고 하는데 이는 과거에 실패한 경험이 많을수록, 발표 경험이 부족할수록, 내성적인 성격일수록 커지는 경향이 있다는 거다. 해결 방안은 충분한 연습과 리허설을 통해 과거의 실패를 번복하지 않도록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단다. 그래, 연습만이 살길이었다.

충분한 연습과 리허설만이 해결책


일요일 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스피치 책을 무릎 위에 펼쳐 놓고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TV를 켰다. 김제동이 진행하는 ‘톡투유’가 방송 중이었다. 그가 말하길, 본인은 재미있는 걸 하면서 돈도 받는다며 농담처럼 너스레를 떨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바로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이다. 나 또한 내가 하는 일(글 쓰는 일)이 재미있다. 매번 그럴 순 없어도 대부분은 나는 내가 좋아하고 재미있어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받는구나,라고 감사히 여길 때가 많다. 이번에 강의를 준비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많이 안 해봐서 그렇지 사람들 앞에서 내가 알고 있는 걸 말로 전달하는 일도 어쩌면 내가 재미있어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고. 모든 건 경험 부족이 문제일 수도 있는 것 아닐까? 김제동도 처음엔 남들 앞에서 말하는 게 두렵고 떨렸을 것이다. 아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말하는 것은 일이고, 경험의 횟수가 늘어나면서 관객과 농담도 주고받을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 강의가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같은 내용으로 2번 진행하는데, 처음보단 두 번째에 여유가 생기길 바란다. 그렇다면 발표 울렁증인 나에게도 일말의 희망이 생기는 것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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