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다 말고 딴생각하기
그의 나이가 곧 서른 살이 된다는 것이나 어릴 적에는 훤칠하다는 소리도 들었지만 지금은 모든 빛을 잃었다는 걸 생각하면 불안을 참기 힘들었다. 인맥도 거의 끊겼고 심한 소화불량과 트림 때문에 아침 점심은 거르다시피 해야 책상 앞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컨디션이라는 것을 떠올리면 우울한 예감이 생겨나서 견디기 힘들었다. 그럴 때 그는 두유를 한두 모금 마셔서 허기를 가시게 하고는 억지로 웃었는데, 우울해질 때를 대비하여 책상 앞에는 이런 표어를 붙여두었다.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만 홀로 울게 될 것이다.”
<이은희 ‘1004번의 파르티타’를 읽다가>
나는 유독 위가 예민하다. 무엇보다 심리적인 요인이 남들보다 크게 작용하는 편인데, 한마디로 위보다 성격이 예민한 거다. 이 글을 쓰는 회사 책상 위에는 소화제만 두세 종류가 있다. 유산균, 물약, 알약 등등 언제 아플지 모르기 때문에 소화제는 수시로 갖춰 놓는다. TV를 보다가 특정 부위에 특정 효과를 나타내는 소화제가 출시되는 광고를 접하면 다음 날 약국에 가서 그 약을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린다.
지난주 일요일에는 완연한 봄이었다. 아이를 데리고 집 앞에 있는 큰 공원에 갔는데 군데군데 반팔만 입은 아이와 어른이 보일 정도였다. 한참을 아이와 뛰었더니 나 또한 얇게 입는다고 입은 청재킷이 덥게 느껴졌다. 한 시간쯤 원 없이 아이를 뛰게 한 뒤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자장면이나 시켜먹자고 제안했다. 우리 동네엔 맘에 쏙 드는 중국집이 없어 늘 불만이었는데 최근 새로운 곳에서 현관문에 광고지를 붙이고 가 그곳에 배달을 시켜볼 생각이었다. 오전에 달걀프라이를 넣은 토스트 한 조각과 커피를 마신 게 전부였던 터라 음식이 배달될 즈음엔 운동화 깔창이라도 씹어먹고 싶을 만큼 배가 고팠다.
‘체할 것 같다’ 생각하면 반드시 체한다
이렇게 배가 잔뜩 고팠다가 밥을 먹으면 식욕 억제가 쉽지 않다. 그래서 생각했던 것보다 꽤 많은 양을 빠르게 먹게 돼 반드시 탈이 난다. 쉴 새 없이 젓가락질을 하면서도 이런 식으로 계속 먹으면 체할 거란 짐작을 했다. ‘체할 거 같아’라고 생각하면서 음식을 먹으면 반드시 얹히게 돼있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왜 그런 생각을 할까, 그리고 내 몸은 왜 그렇게 정직할까. 자장면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함께 시킨 탕수육에 소스를 푹푹 찍어먹으면서 음식물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더부룩 해지는 걸 느꼈지만 쉽사리 젓가락이 식탁 위에 내려놔지지가 않았다. 이미 나는 자제력을 상실한 것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식탐이 있다고 인정하고 말하고 다닌다. 어떤 인정은 꽤나 쿨한데 식탐 있단 인정은 뭔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도 말하는 이유는 뭘까. 나도 잘 모르겠다. 식탐이 많으면 일단 사람이 추해진다. 남들보다 더 많이 먹으려고 젓가락이 분주해지기 때문이다.
소화불량을 늘 달고 산다. 지금은 아니지만 한 때는 체했을 때 손을 쉽게 딸 수 있는 사혈기를 가방에 넣고 다녔다. 야근하다가 체했다 싶으면 알코올 솜과 사혈기를 꺼내 거침없이 손가락을 찔렀다. 손가락 하나도 아니고 무려 4군데를. 아직까지도 급체했을 땐 이 방법이 가장 좋다고 믿기 때문에 나뿐만이 아니라 친구 동료가 체한 것 같다고 말만 꺼내도 바로 사혈기를 꺼내 들었다. 의례 체하면 나한테 손을 내밀며 다가오는 동료도 있었다. 퇴근하기 전까지 거의 대부분을 의자에 앉아 노트북만 두드리다 보니 운동량이 많이 부족하다. 점심 먹고 바로 들어와 앉아 일을 시작하면 당연히 소화가 안 된다. 딱딱하게 뭉치기 시작하는 윗배를 쓰다듬으며 허리를 곧게 펴 보지만 쉽게 풀어지지 않는다.
다시 지난 일요일 먹은 자장면으로 돌아와, 저녁을 배불리 먹어 놓고 아이가 피곤했는지 일찍 잠들어 남은 일요일 밤 영화라도 한편 보고 자야 덜 억울할 것 같아 IP TV를 켰다. 남편과 합의하에 ‘공조’를 보기로 했고 그는 영화가 시작되기 전 너무 자연스럽게 냉장고에서 쥐포를 꺼내 굽고 캔맥주를 가져왔다. 배가 불렀는데, 안 먹을 수 없었다. 달콤하고 짭쪼름한, 그 단짠 내를 무방비로 버틸 수 없었다.
“나도 한 캔 마셔야겠다.”
냉장고에서 하이네켄을 꺼내고 싱크대 선반에서 꼬깔콘을 챙겨 안방으로 향했다. 영화는 단조롭게 유쾌했고 시원한 맥주와 ‘단짠’ 안주가 입에 들어가는 동작은 멈출 줄 몰랐다. 밤 10시에 너무 많이 먹은 거 아닌가 싶었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뱃속에 정착했는걸. 영화가 끝나고 자연스럽게 체중계에 올랐다.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숫자를 보고 나도 모르게 ‘헉’ 소리를 내뱉었다. ‘내일 점심은 굶어야겠군.’
아플걸 예상한다면 적게 먹으면 될 것을, 나 정말 미련스럽다
종종 있는 일이다. 전날 좀 많이 먹었다 싶으면 대체로 (저녁보다) 참기 쉬운 점심을 거른다. 그랬는데… 배가 너무 고팠다. 원래 전날 많이 먹으면 다음날 더 배가 고픈 법. 왜냐 위가 그만큼 늘어났으니까. 오늘 점심은 패스 하겠단 말을 아주 간단히 삼킨 채 동료들과 눈누난나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하필 정한 메뉴가 푸짐하게 한 상 차려 나오는 백반집. 동료들끼리 얘기하기로 진짜 엄마보다 잘 차려주는 식당이었다. 밥을 반공기만 먹어야지, 했는데 밥을 더 퍼다 먹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로 꿀맛이었다. 양념이 잘 밴 제육볶음과 매콤하고 맑게 끓인 콩나물국의 조화란. 그렇게 밥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싹싹 긁어먹은 나는… 지금 소화제만 3개째 먹고 있다. 장 운동을 활발하게 한다는 유산균을 시작으로 30분쯤 있다가 알약을 먹고도 통증을 참기 힘들어 마시는 약을 또 먹었다. 그래도 뭔가 시원하게 뚫리는 감이 없어 속을 따뜻하게 해주는 쌍화차를 타 마셨다. 이쯤 되면 나의 식탐과 단칼에 끊지 못하는 식욕이 제대로 원망스럽다. 꼭 이렇게 다 먹고 나서 후회한다. 그리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일단 저녁은 정말로 굶어야겠다고 다짐했다.(다짐은 했다) 속은 계속 더부룩해지고 복부 팽만감은 잦아들지 않았다. 계속 움츠려 드는 허리를 곧게 펴기 반복했지만 찌릿찌릿한 위 통증이 쉽게 가시질 않는다. 아, 빨리 집에 가서 눕고 싶다. 맛있는 걸 앞에 두고 이렇게 아플 걸 예상한다면 적게 먹으면 될 것을. 아, 나는 얼마나 미련스러운가. 매번 배가 찢어질 것처럼 먹고 나서야 깨달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