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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Apr 03. 2017

의심은 의심만 낳는다

책 읽다 말고 딴생각 하기

작아진 아이 티셔츠나 남편의 낡은 속옷 자투리가 걸레로 쓰기에는 제격이다. 부드럽고 보풀이 일지 않는데다 잘게 찢을 수도 있다. 표백제를 풀고 단숨에 철벅철벅 빤 것을 네모나게 잘라 모양을 잡은 뒤 아낌없이 실컷 쓰고 휙 버린다. 
<니시카와 미와 ‘어제의 신’을 읽다가>



얼마 전 사내 교육 관련 발표 준비를 하다가 읽은 빅데이터 책에 의하면 사람들이 주로 쇼핑하는 시간대가 정해져 있는데, 그게 오전 11시 오후 2시 그리고 밤 9시라고 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새벽 1시가 남아 있는데, 이때는 밤의 감수성과 알코올이 합동 작전을 펴 꽤 비싼 물건도 그냥 ‘지르는’ 일이 벌어지곤 한단다. 나도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주로 잠들기 전에 누워서 갖가지 쇼핑을 한다. 그게 주로 새벽 1시다. 불도 다 끄고 휴대폰 화면 불빛에만 의지한 채 가끔은 이마 위로 휴대폰을 툭 떨어트리기도 하면서… 그날도 새벽 1시가 넘은 시각, 푹신한 요 위에 지친 몸을 누이며 휴대폰을 켰다. 그냥 자도 될 것을 괜히 이것저것 둘러보다가 속옷을 주문하고 만다.


평일이었고 잠결이었고 피곤했고…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그날 밤 내가 (무슨 연유로) 속옷 샀단 사실을 까맣게 잊었다. 물론 그것 외에도 내가 주문한 물건은 많았다. 아이 기저귀, 생수, 고양이 화장실 모래, 청바지 등등. 퇴근하고 돌아오면 늘 문 앞에는 기본 한 개 이상의 택배 상자가 늘 놓여 있었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반상회에서 옆집 아저씨는 남편에게 돈 벌어서 애기 물건만 사나 봐?라고 우스갯소리를 했다는데, 하루가 멀다 하고 집 앞에 쌓여있는 택배 박스가 못 마땅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날 밤 잠결에 한 속옷 주문을
까맣게 잊었다


그렇게 잊고 있던 속옷 주문이 생각난 건 그로부터 5일이 지나서였다. 상품은 잘 받았느냐는 확인 문자 때문이었는데, 그때부터 부랴부랴 받지도 않은 택배를 찾기 시작했지만 물건은 온데간데없었다. 혹시 남편이 받아놓고 말해주지 않은 건 아닐까 싶어 그에게 확인해 봤지만 모른다는 대답과 함께 또 뭘 산 거냐는 핀잔만 들었다. 속옷 정도는 남편 모르게 서랍에 넣어둘 수 있었는데… 일단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물건을 산 업체에 연락을 해서 배송이 된 건지 확인하는 거였다. 그쪽에서는 문제없이 배송되었다고 나왔다. 그런 다음 택배 분실이니까 택배 업체에 문의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주문 정보 조회를 통해 해당 택배 업체를 알아내고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곧장 사이트에 접속해 관련 내용을 적고 문의글을 남겼다. 그 사이에도 같은 택배 회사에서 몇 건의 물건을 더 받았지만 퇴근이 늦어 만날 수도 없었을뿐더러 뭔가 확실하지 않으니 택배 기사에게 다짜고짜 택배의 행방을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렇게 하루를 기다리자 내가 남긴 문의글에 답변이 달렸는데, 말인즉슨 내가 받은 정보대로 물건은 배송 완료된 상태가 맞고 분실되었다면 택배기사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라고 했다. 그러곤 기사의 전화번호를 남겼는데, 그 기사의 전화번호는 나도 이미 갖고 있는 번호였다. 요즘은 물건이 배달되기 전 택배기사의 전화번호로 몇 시쯤 물건이 도착한다는 내용이 문자로 오기 때문이다. 나는 휴대폰을 들고 복도로 나와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또 했다. 또 연결되지 않았다. 그렇게 내 의심은 증폭되기 시작했다.

illust by 윤지민


이런 일이 발생하면 잡념이 많아지는 법. 분실된 물건의 행방에 대한 나의 다음 의심 타깃은 옆집 아저씨였다. 그 의심의 단서는 그가 반상회에서 했다던, 돈 벌어서 맨날 뭘 그렇게 사냐는, 비꼬는 듯한 (정작 나는 실제로 듣지도 않았지만) 그의 말 때문이었다. 맨날 우리 집 앞에 택배 상자가 쌓여 있는 걸 못마땅하게 생각한 아저씨가 혹여 작은 상자 하나를 그냥 가져간 게 아닐까? 처음에는 물건을 주문한 업체를 의심했고, 그다음은 택배 업체를 의심했고 다음은 택배 기사를 의심했고 마지막으론 옆집 아저씨를 의심했다. 의심은 의심을 낳았다. 그때부턴 모든 게 불안했고 또 다른 물건도 없어지는 건 아닌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최대한 무거운 게 아니면 물건은 회사에서 직접 받기로 했다. 끝내 택배기사와 전화연결은 되지 않았고 시간이 일주일 이상 넘어가다 보니 그를 만나 뭘 어떻게 따지겠냐는 생각이 커졌다. 난 이미 택배 분실의 원인은 옆집 아저씨라고 단정 지었는지도 모른다. 그 사이 출근길 엘리베이터에서 옆집 아저씨를 두어 번 마주쳐 인사했고 그는 여느 때와 같이 나와 함께 있는 아이를 보며 사람 좋은 미소로 웃었지만 나는 그 시선이 곱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게 하필 속옷이어서 더 찜찜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로부터 한 달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분실된 택배에 대해선 잊어버리기로 했고 가히 큰 금액이 아니어서 인터넷 쇼핑을 그렇게 많이 하는데 그중 하나쯤 없어질 수도 있지,라고 쿨하게 훌훌 털어 넘기기로 했다. 이상하게 귀찮기도 했다. 끈질기게 택배 업체에 전화하거나 택배 기사에게 어떻게든 억울함을 분담하게 해서 일말의 보상이라도 받을 수 있었겠지만, 그냥 만사가 귀찮았다. 잠결에 주문한 물건이기도 했다. 그렇게 꼭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의심부터 하지 말라고 했지만
괜히 머쓱해졌다


엊그제 오랜만에 회사 동료들과 술자리를 갖고 밤 12시가 다 되어 집에 도착했다. 요금을 지불하고 택시에서 내려 건물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데 우편함이 눈에 띄었다. 우리 집 우편함이 뭐가 많이 왔는지 유독 꽉 차 있길래 각종 고지서를 하나 둘 빼내고 있을 때였다. 우편함에 뚫린 500원짜리 동전보다 큰 두 개의 구멍 사이로 종이가 아닌 물체가 보였다. 앞에 있는 고지서들을 꺼내고 손을 더 깊숙이 넣었다. 손을 우편함에 넣는 순간부터 ‘그거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건 다름 아닌 그 문제의 분실 택배였다. 박스가 아닌 택배는 손바닥보다 조금 큰 사이즈로 우편함에 쏙 들어가는 크기였다. 아… 드디어 잃어버린 그 속옷을 찾은 것이다. 그것도 한 달 만에…


택배가 작기도 하고 5층인 우리 집까지 올라가기도 귀찮았던 택배 기사는 1층 외부에 있는 우편함에 물건을 넣고 나에게 문자, 전화도 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잠결에 물건을 주문한 나는 제때 도착하지 않은 물건이 별로 궁금하지 않았고, 그렇게 택배는 잊혔던 것… 기사가 애초에 물건을 잊어버린 것이다, 택배 업체는 기사와 한통속이다, 옆집 아저씨가 내 택배를 가져갔다, 온갖 의심에 의심을 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오늘 아침, 친정엄마는 내게 전화로 하소연을 시작했다. 가방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사할 때 엄마가 아끼는 고가의 가방들만 따로 차에 실어 왔는데 정리하려고 보니 가방 하나가 안 보인다는 거다. 단순히 안 보인다는 생각을 했을 땐 어디 박혀 있겠지 생각했는데 어제 집을 발칵 뒤집어서 탈탈 털어도 그 가방만 보이질 않는다는 거였다. 결국 이런저런 생각 끝에 인테리어 공사를 해주던 사람들이 며칠 간격으로 집에 드나들며 AS를 해줬는데 아무래도 그 사람들이 의심스럽다는 거였다.


“내가 그 사람들이 전등 수리하는 동안 빵가게를 다녀온 적이 있거든. 아마도 그때인 것 같아.”


엄마의 의심은 시작됐다. 나는 일단 더 비싼 물건이 없어지지 않았으니 다행이지 않느냐는 말과 함께 덮어두고 의심부터 하진 말라고 (성인군자처럼) 말했지만 얼마 전의 나를 봐선 뒤통수를 긁적이고 싶을 만큼 괜히 머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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