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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May 22. 2017

난 참 잘 내려놓았다

책 읽다 말고 딴생각 하기

이제 나는 화장을 안 해도, 청바지에 굽 낮은 신발만 신고서도
여자이기에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다.
 
<파비오볼로 ‘아침의 첫 햇살’을 읽다가>



그런 때가 있었다. ‘옷을 어떻게 안 입어 보고 사?’ 라고 단정 짓던 때.


불과 십여 년 전인 것 같은데 요즘의 나는 그 반대다. 그러니까 오프라인에서 물건을 사기가 더 어려워진 것이다. 그만큼 매장에서 물건을 살 때 절제가 더 쉽다.
지난주 수요일, 점심을 패스하고 반품할 청바지를 챙겨 회사를 나섰다. 얼마 전 자라(ZARA)에서 온라인으로 바지를 샀는데 막상 입어보니 생각했던 핏과 달라 반품을 결정한 것.(키 178센티미터의 외국인 모델과 핏이 같을 거라 생각했던 내가 이상한 거였지만) 자라는 온라인(앱)에서 구매한 뒤 마음에 안 들면 가까운 매장에서 직접 환불, 교환 처리가 가능한데 합정에 위치한 회사와 자라 홍대점이 가까워 두어 번 반품한 경험이 있다. 택배로 반품할 물건을 부치고 환불처리를 기다리는 것보다 나로서는 훨씬 편했다. 나는 이 시간을 살짝 즐기기까지 했는데 그 이유는 다른 물건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핑계 삼아 가서 아이쇼핑도 할 수 있고 일석이조였다. 근데 문제는 이렇게 반품하러 갔을 때가 막상 온라인으로 물건을 구입하는 것보다 더 어렵고 진지하다는 것이다.

매장에선 자제가 쉽다


그날도 바지를 반품 처리하고 어쨌든 바지를 사려고 마음먹었던 오만 구천 원이 공중에 떠버렸으니 다른 것도 좀 둘러볼까 하여 매장을 천천히 돌았는데(평일 점심시간엔 민망할 정도로 손님이 없다) 온라인에서 멋진 외국 모델이 입고 들고 신었던 상품이 실제 눈앞에 있으니 괜히 반가운 마음까지 들었다. 실물을 보고 싶은 마음이 컸던 가방이나 구두는 실제로 메보고 신어보니 확실히 사야 할 물건인지 필요 없는 물건인지(대부분이 필요 없지만) 구분이 되었다. 몇 개의 가방을 거울 앞에서 둘러 메 보다가 단호박처럼 제 위치에 내려놓고 왠지 가벼운 마음으로 매장을 나섰다. 나오기 직전까지 살까 말까 망설이다가 직원에게 새 상품이 없는지 까지 물어보았지만 결국엔 사지 않았다.

illust by 윤지민


아무것도 사지 않아 괜히 홀가분해진 마음으로(왜 홀가분한진 모르겠으나) 사무실에 들어가다가 시간이 좀 남아서 땡스북스(서점)에 들렀다. 그런데 그 자제력이란 게 오프라인 서점에서도 통했다. 나는 주로 온라인으로 책을 주문하는데, 어디선가 추천하거나 재미있단 이야기를 들은 책은 그때그때 장바구니에 담아 놓고 한꺼번에 네다섯 권씩 몰아서 주문한다. 근데 서점에서 책을 직접 펼쳐 보고 심지어 내용을 몇 장 읽어 본 책은 내려놓기가 쉬웠다. 책 충동구매도 적지 않게 하는 나로서는 참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심지어 온라인 서점 장바구니에 담아 놓았던 책도 실제로 펼쳐 보고선 사지 말아야지, 하고 단념하게 되었으니 무슨 조화란 말인가.


손에 잡히지 않을수록 구매욕이 상승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사지 않고 서점 문을 밀고 나오며 생각했다. 이제 온라인 구매에 최적화되었구나… 예전에는 옷뿐만 아니라 잡화는 물론 책도 반드시 펼쳐보고 몇 장 읽어 봐야지 구매가 가능했다. 하지만 요새는 SNS에서 드라마틱하게 책을 홍보하는, 스토리가 있는 광고를 보고 구입하게 된다. 내 판단에만 의존하기보다 누군가 추천해줘야 사기가 수월해진 것이다. 신발이나 가방도 그렇다. 오프라인에서 보고 인터넷으로 다른 사람의 후기를 반드시 체크해야 안심이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뭔가 손해 볼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마트에서 장보기는 어떤가. 라면이나 참치캔 같은 인스턴트 음식은 둘째치고 파, 두부, 달걀 같은 식물성 상품은 반드시 내 손으로 확인하고 그 신선도를 눈으로 봐야 구매가 가능할 거라 생각했지만 이젠 오징어 같은 생물도 인터넷으로 쉽게 주문한다.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라더니 어느샌가 만져보고 사는 것보다 누군가 대신 입어보고 신어보고, 후기나 추천을 들어야 사는 것에 길들여진 모양이다.


일명 동대문표 티셔츠라 불리는 옷이 있다 치자. 똑같은 옷이 매장 옷걸이에 걸려 있는 것과 온라인에서 모델이 입고 다양한 곳에서 이런저런 포즈를 취해본 것 중 어느 것에 구매욕이 더 상승하는가 당연히 후자다. 그만큼 후가공을 많이 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내가 온라인 구매에 완전히 길들여져 버린 건 확실하다. 매장에서는 “다음에 또 올게요” 가 쉬운 반면 장바구니에 담아둔 옷은 결국 질러야 잠들 수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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