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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Jun 08. 2017

지난날 전공 선택을 후회해

책 읽다 말고 딴생각 하기

언니는 아침마다 시간표에 따라 동생의 교과서와 공책, 알림장을 챙기고, 요술공주 캐릭터가 그려진 두툼한 필통에 너무 뭉툭하지도 너무 뾰족하지도 않게 심을 깎은 연필 네 자루와 지우개 하나를 넣었다. 
<조남주 ‘82년생 김지영’을 읽다가>



나는 쓰는 것보다 그리기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스프링 달린 공책과 연필만 있으면 혼자서도 몇 시간씩 심심하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게 그때 내가 그렸던 ‘공주’인데 목에서부터 어깨로 내려오는 곡선에 특히 주의를 기울였고 드레스는 반드시 오프숄더였다. 지금이야 오프숄더가 뭔지 알지만 그땐 만화에 나오는 공주들이 다 그런 옷을 입었으니까 늘 그렇게 그렸던 것 같다. 웃기는 건 가슴께에는 반드시 가슴골 상징하는 라인을 그렸다는 것. 풍만한 가슴은 아름다운 공주의 상징이었으니까. 틈만 나면 공주를 그리던 내가 쓰기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한 건 중학교 때부터였다. 중학생이 공주를 그릴 순 없으니 자연스럽게 글쓰기로 넘어갔느냐 하면 그건 아닌 것 같고 아무튼 나는 ‘글짓기’라는 허무맹랑함이 돋보이는 작업에 매력을 느꼈던 것 같다. 몇 달에 한 번씩 교내 글짓기 대회가 있곤 했는데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소방차 그리기, 고궁 그리기 대회 같은 그림 대회에서 종종 상을 탔던 나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독후감 쓰기, 각종 글짓기 대회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야기 짓는 게 좋았던 나


지금 내가 소설에 집착하고 이야기 지어내는 것에 매력을 느끼는 건 어쩌면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중학교 1학년 겨울이었다. 교내 불우이웃에 관한 글짓기 대회가 있었는데 나는 있지도 않은 불우이웃을 지어내 글을 썼다. 막힘 없이 한 번에 쭉 썼던 기억이 나는 걸로 보아 드라마를 참 많이 봤던 것 같다. 그때 내 생각은 글짓기니까 당연히 지어서(허구로) 쓰면 되는 줄 알았다.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내가 지었던 내용은 이런 거였다. 홀 아버지와 함께 사는 영수라는 아이가 아버지 일 나가시고 집에서 홀로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잠이 들었다가 연탄가스에 질식해… 더 이상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못 쓰겠다. 지금이야 듣기 거북하지만 당시에는 꽤 센세이션 했는지 글을 내고 다음 날 국어 선생님이 나를 교무실로 불렀다. 무슨 일인가 싶어 종종걸음으로 달려갔더니 깡마르고 하얀 얼굴의 국어 선생님이 다짜고짜 이 학생이 누구냐고 묻는 거였다.


-누구요?
-이 얘. 네가 글짓기에 쓴 불우이웃 영수.
-영수요…? 얘는… 그냥 제가 지어낸 건데요?

글짓기라 당연히 지어서 썼다는 내 말에 선생님은 할 말을 잃었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영수가 실존 인물이라면 나는 최우수상을 탔을 거였다. 맥 빠진 선생님의 그만 돌아가도 좋다는 말을 듣고 조용히 교무실을 빠져나오며 글짓기는 허구를 쓰는 게 아니란 걸 처음으로, 그것도 중학교에 들어가서 알게 된 것이다.

illust by 윤지민


어쨌거나 그 뒤로도 나는 이야기 지어내는 게 재미있었다. 당시 한 학년을 마칠 때마다 문예지 만드는 과정이 있었는데 나는 당연히 단편 소설을 써서 냈다. 줄거리는 이렇다. 사투리가 심한 남자아이 A가 있다. A는 같은 반 여자 아이 B를 좋아하는데 자신에게 별 감정이 없는 B를 보며 B가 자신을 싫어하는 건 다 자신의 사투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자신이 생각한 대로 믿으며 어른이 된 A는 어느 날 우연히 B를 만나는데 B는 이미 결혼을 한 상태였다. B의 집에 초대된 A는 그녀의 남편과 인사를 나누는데 그는 A보다 심한 사투리를 쓰는 거였다. 그때까지 B가 자신을 밀어낸 이유가 사투리 때문이라 믿었던 A는 사투리가 문제는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데는 겉으론 알 수 없는 뭔가에 이끌린다는 걸,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란 걸 그때 알고 쓴 건 절대 아님에도 지금 생각하면 참 성숙한 생각이 아니었나 싶은 자화자찬이다.


전공, 조금 더 신중히 선택했더라면


지난주부터 매주 목요일마다 소설 쓰기에 관한 수업을 들으러 다닌다. 아이 낳기 전에도, 임신으로 만삭이었을 때까지 나는 소설에 관한 수업을 들으러 다녔다. 필요하다면 소설뿐만 아니라 시나리오 작법도 들었다. 그런 시간이 나에겐 엄청난 시너지가 되고 소중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좋은 기회가 있으면 꾸준히 다닐 예정이다. 내가 문학을 전공한 게 아니어서 이런 배움에 더 목말라하는지도 모르겠다. 돌이켜 보면 그림을 그리던 그 순간이 불행했던 건 아닌데 조금 후회가 된다. 가장 후회되는 건 전공을 ‘가구 디자인’으로 정했던 것이다. 내 의사가 아니라 미술학원에서 점수에 맞게 정해준 거였기 때문에. 무엇보다 가구 디자인은 말 그대로 디자인을 한다기보다 가구를 만드는 것에 가까워서 직접 원목을 사러 다니고 지하 공장 같은 곳에 들어가 내 손가락이 날아갈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고(실제로 손가락이 절단된 선배도 있었다) 횡절반(목공기계)으로 나무 판때기를 잘라야 하는 위험천만한 곳이었다. 당시 나는 그 수업이 너무 무섭고 싫어서 수업을 제대로 나가지도 않았다. 정말 간신히 졸업만 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정말 좋아하는 걸 찾지 못했던 것 같다. 당시에는 이거 아니면 죽을 것 같단 생각으로 입시미술학원에 다녔다기보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좀 (어정쩡한) 재능이 있었고 공부에는 그리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에 조금 있어 보일 수 있는 미술의 길을 택한 게 아니었나 싶다. 나는 쉬운 길만 택했다. 조금 더 돌아가더라도 그때 잠깐 멈추고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게 뭐였을까, 뭘 할 때 가장 행복했나를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더라면 후회를 덜했을 텐데. 그땐 왜 그렇게 쫓기듯 진로를 정했는지, 휴학도 해보고 그 기간 동안 다른 일도 좀 해보면서 진짜 원하고 잘할 수 있는 걸 찾았더라면 좀 다른 인생이 되지 않았을까? 물론 그렇다고 지금의 내가 불행한 건 절대 아니지만 읽고 쓰는 것을 이렇게 좋아했는데 왜 진작 이게 내 길일지도 모른다는 발견을 못했던 걸까 회한이 되기는 한다. 그렇다고 늦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아니다. 지금도 충분히 원하는 걸 쓸 수 있고 도전해볼 기회는 얼마든지 있으니 말이다. 글을 쓴다는 것만큼 나이와 환경의 제약이 없는 장르도 드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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