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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Jun 10. 2017

변명인 줄은 압니다만

책 읽다 말고 딴생각 하기

부모는 근검절약하는 생활이 몸에 밴 사람들이었다. 지난해의 달력을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다가 뒷면으로 교과서의 표지를 싸고, 모나미 볼펜 껍데기를 잘라 뭉툭해진 몽당연필 끝에 끼워 쓰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상의 풍경이었다.  <정이현 ‘말하자면 좋은 사람_시티투어버스’를 읽다가>



남편의 생일을 까먹었다. 여름이 무르익기 시작하는 6월의 첫 날인 그의 생일을 말이다. 보통은 달력에 체크를 해놓고 전날 알람까지 설정해 놓기 마련인데 까맣게 잊고 말았다. 생각 없이 아침마다 작성하는 아이의 어린이집 알림장에는 “선생님 벌써 6월의 시작이네요. 시간이 어쩜 이리 빠를까요?”라고 천연덕스럽게 써놓기까지 했으면서… 나는 뭐라 변명도 못하고 남편에게 무조건 잘못했다고 미안하다고만 했다. 어쩜 이렇게 잊을 수 있는지 나조차도 내가 너무 어이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전혀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 (물론 무슨 말을 한들 섭섭한 그의 마음을 달랠 수는 없을 테지만) 나를 변명해줄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 내가 나를 변호(?)하자면, 나는 너무 챙겨야 할 게 많다.


우선 그 문제의 생일 아침에도 나는 6시 15분에 우리 집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남편을 깨운 뒤 어린이집에서 아이가 아침에 먹을 밥을 준비해야 했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볶음밥을 만들면서 한 손으론 어린이집 알림장을 체크했다.


‘OO이 여벌 바지가 없습니다. 보내주세요’
‘기저귀가 5장 남았습니다'
‘내일은 미소반 OO이의 생일입니다. 3,000원 미만의 선물을 준비해주세요.’

내 몸은 하난데 챙길 게 너무 많아


물론 이 모든 게 한 날 보내진 메모는 아니지만 대부분 이런 걸 알림장에서 체크하고 챙겨야 한다. 그렇게 아침밥이 다 만들어지면 도시락을 싸고 아이를 깨워 세수를 시킨 다음 옷을 입힌다. 세 식구가 집을 나서기 전 고양이 밥을 챙겨야 한다. 밥그릇에 사료를 부어주고 물그릇은 새 물로 채운다. 혹시 모르니 공기청정기를 틀어놓고 머리카락을 말리면서 열어놨던 안방 욕실의 창문을 잠그고 거실 창문도 닫는다. 우리가 없는 사이 고양이가 들어가지 않도록 방 문을 꼭 닫아 놓는다. (정말 사소하지만 빼먹으면 안 된다) 뿐만 아니라 세탁한 아이의 낮잠 이불을 챙겨 보내고 이달 어린이집 교육비를 봉투에 챙겨 넣는다. 그때 불현듯 친정 엄마 집에 보낼 생수를 주문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부랴부랴 휴대폰을 꺼내 쿠팡에 들어가 2리터 생수 12개를 주문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에도 생수가 떨어졌네, 물티슈도 주문해야 되는구나! 조만간 기저귀도 더 주문해야 될 것 같은데 OO이는 언제 기저귀를 떼려나… 말 그대로 챙기고 신경 쓸 것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illust by 윤지민


회사에 출근해서는 어떤가. 다이어리에 빼곡히 적힌 그날 넘겨야 할 기획전 타이틀 작업들을 챙겨야 하고 미팅 시간을 챙겨야 한다. 오늘 써서 보내야 할 원고를 쓰고… 아! 그러고 보니 공과금 내야 될 때가 됐다. 대출 이자도 이체해야 되고… 아이와 남편이 마시는 건강음료 결제일은 며칠이더라? 챙길 게 이렇게 많은데 그 와중에 소설 공부를 더 해보겠다고 학원을 다니고 있어서 이번 주 과제와 읽어가야 할 단편소설도 챙겨야 한다. 신경 쓸 게 너무 많아서 그리 크지도 좋지도 않은 내 뇌에 과부하가 올 지경이다.


포기하고 받아들이자, 이게 자연스럽다


한동안 깨끗이 살아야지, 마음먹고 정리정돈에 힘쓰던 나는 불과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원점으로 귀환했다. 정리정돈을 할 수 없는 건 내가 이렇게나 신경 쓰고 챙겨야 할 게 많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만난 제니퍼 매카트니의 ‘나는 어지르고 살기로 했다’는 정말 구세주 같은 책이었다. 점심을 먹고 들어와 잠깐 잠도 쫓을 겸 책을 펼쳤는데, 36 페이지에서 기적과 같은 문장을 만나고 말았다.


“신경 쓰지도 말고 죄책감이나 실패했다는 느낌도 잊어라. 따분하기만 한 정리정돈은 잊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너저분함을 음미해라.”


너저분함을 음미하라니! 때마침 내 머릿속으로는 전날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정전기 방수포로 거실 고양이 털을 치우지 못하고 와서 엉망인 우리 집이 둥실 떠올랐다. 개지 않고 몸만 쏙 빠져나온 이부자리와 걷지 않은 지 일주일이 다 돼 가는 주말에 한 빨래… 그래, 너저분함을 음미하자, 이건 실패한 게 아니야. 책이 그렇게 말하고 있잖아! 나는 마음이 너무 편안해졌다. 하나부터 열까지 완벽해서 아이도 최고로 깔끔하게 키우고(사실 나는 이틀에 한번 꼴로 아이 목욕을 시킨다, 어쩔 땐 삼일…) 떨어진 머리카락 하나 없이, 싱크대엔 밀린 설거지 따위 없이 완벽한 집을 원하진 않았다. 그렇게 할 수도 없다. 내 몸은 열두 개가 아니니까. 하지만 이만큼 하는데도 늘 죄책감과 찝찝함은 공존했다. 하지만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누굴 위해서 그런단 말인가.  이건 다 자기만족이다. 나를 내려놓으면 된다. 이제부터 내가 우상 시 하게 될 제니퍼 매카트니는 이렇게 말한다.


“포기하고 받아들여라. 미안하지만 지금이 자연스러운 상태이다.”


자연스러운 상태. 이 말이 나를 얼마나 편하게 만들어줬는지 모른다. 어려운 말 하나 없는 자연스러운 상태라는 이 말이. 일 년에 단 하루뿐인 남편의 생일을 까먹은 나지만 이게 나다. 나는 이게 자연스러운 거라고 받아들였다. (그는 분통해하고 있지만. 그도 이런 나를 자연스럽게 받아주길) 여기에 나열한 내가 신경 써야 할 것들은 진짜 일부일 뿐이다. 그러니 나는 가정과 일과 육아를 이만큼 이끌어 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견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자연스럽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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