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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Jul 17. 2017

화분, 어쩌면 관계의 시작

책 읽다 말고 딴생각 하기 

젊어 생리적으로 왕성히 생성되던 호르몬이 줄어든 탓에 성욕을 비롯한 다른 많은 욕구들이 동반하여 줄어들고, 따라서 젊은 활기를 잃어버린 대가로 화분을 가꾸거나 읽지 않던 책에 손이 가곤 하는 것이다. 
<이석원 ‘보통의 존재’를 읽다가>



보통의 중년 여성이 그렇듯 우리 엄마도 꽃과 화분을 참 좋아한다. 제일 좋아하는 건 꽃이 핀 화분이다. 이 나간 사기그릇에 물을 담아 키우기 시작한 행운목을 화분에 옮겨 심을 수 있을 만큼 키워내고 싹이 나기 시작한 고구마나 양파도 멋들어진 화훼로 승화시킨다. 어릴 때부터 엄마가 식물 관리하는 걸 틈틈이 보고 자라서인지 나도 지나가다가 앙증맞은 화분을 보면 사서 키우고 싶은 욕심이 생기지만 신기하다 싶을 정도로 잘(?) 죽여서 이젠 어느 정도 단념한 상태다. 엄마는 베란다에 하나 둘 화분이 늘어가는 걸 보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우리집이나 언니네도 이 기세를 이어가고 싶어 한다. 던지듯 떠넘긴 화분을 잘 키우고 있는지 매번 체크하는 것도 일일 텐데 말이다. 며칠 전에도 퇴근 후 아이를 데리러 친정에 갔는데 부랴부랴 따라 나오더니 자신의 차 트렁크에서 커다란 군자란 화분을 꺼내 오는 것이다. 물을 적게 줘야 하는 식물은 많이 줘서 죽이고 자주 줘야 하는 식물은 너무 무관심해서 결국은 죽이는 게 목적인 것처럼 키우지 못하는 나에게, 엄마는 안 가져가면 길에 드러눕기라도 하겠다는 듯 군자란을 떠넘겼다.


“너희 집 옥상 테라스에 갖다 올려놔. 꽃 피면 정말 예뻐!”

비어 있는 공간을 그냥 두지 못한다


왜 엄마는 엄마 집을 너머서 우리집 테라스까지 신경 쓰며 빈 곳을 허락하지 않는 것일까. 최근 읽은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에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와 피식 웃은 기억이 난다. 오래전 글쓴이(사회학자 ‘기시 마사히코’)의 이웃 아파트에 혼자 사는 할머니가 있었단다. 나가다가 붙잡히기라도 하면 이야기가 길어져 될 수 있으면 안 마주치려 노력하며 지냈는데 한 번은 그 할머니가 작은 화분을 가져다주었다고 한다. 고맙다고 인사하고 받았는데,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화분을 갖고 오시는 게 아닌가. 넷째 날에는 거절했더니 멋대로 집 앞에 놓고 갔더란다. 막판에는 살짝 화를 냈더니 할머니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고. 그래도 화분은 얼마나 그곳에 있었는데 아무래도 할머니는 아무것도 없는 글쓴이의 현관을 못참아 한 것 같았다는 것이다.


‘비어 있는 공간이 있으면 귀여운 것으로 메우고 싶어 지는 걸까.’ 
(기시 마사히코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p45)

신혼 때는 엄마가 이렇게 하나 둘 주는 화분을 기분 좋게 받아서 창가에 올려두는 걸 즐겼지만 잘 키우지 못하기도 하고 이젠 좀 허전한 인테리어가 좋기도 해서 일부러 자제 중인데 엄마는 어쩌다 우리집에 들렀다 가면 그다음에는 반드시 그 빈 공간에 둘 화분을 마련해 놓는 것이다.


illust by 이영채


엄마는 화분으로 말을 건다


앞서 말한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에 의하면 학생들이 구술 조사를 했는데 여성들이 인간관계를 맺어 나갈 때, 대문 앞 화단이 한몫을 한단다. 누군가 대문 앞에서 화분에 물을 주고 있으면 ‘어머 참 예쁘네요’하며 말을 걸어온다. 그걸로 대화는 시작되어 꽃을 피우는 법에 대해 수다를 늘어놓는 것이다. 화분으로 대화에 물고를 트면 이후엔 가족 얘기 등 사적인 이야기까지 서슴지 않는다. 일전에 나도 이와 비슷한 일화가 있었는데, 그날도 역시 아이를 데리러 친정에 갔는데 엄마가 차에 뭘 두고 왔다며 나를 따라 내려왔다. 난 아이 손을 잡고 우리 차로 향해 앞서 걸어가고 있던 중이었는데, 엄마가 누군가에게 “아이고 왜 밥풀을 묻히고 다니셔”라고 말하는 거다. 난 엄마가 누구에게 말하는 건가 싶어 돌아봤는데, 그 말을 들은 아주머니는 너무 자연스럽게 “에구 어디요?”라고 물으며 발걸음을 멈췄고 엄마는 여기요, 여기 라면서 아주머니의 팔 안쪽을 가리켰다. (거기에 밥풀 묻은 걸 어떻게 봤을까?) 그 아주머니는 “하하, 이게 왜 여기 붙었지?”라고 웃더니 아무렇지 않게 다시 가던 길을 갔다. (밥풀 묻은 거 알려줘서 고마워요, 따위의 인사 같은 거 전혀 없어도 기분 나빠하지 않는다) 둘은 그 순간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엄마도 대수롭지 않게 볼일을 보러 발걸음을 옮겼는데 난 그 모습이 너무 웃겨서 혼자 푹, 하고 웃음이 터졌다. 낯선 이에게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거는 건 그 나이가 되면 자연스럽게 되는 것일까. 이게 나이만 먹는다고 되는 건 아닌 게 남자들은 어렵다는 점이다. 중년 남자들은 일이 아니면 타인과 이어지는 일이 별로 없다. 남자들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날씨 이야기를 주고받는 게 서툴다.


누군가에게 꽃을 건네거나 현관 앞에 화분을 늘어놓는 일은 우리 세대가 보기에 번거롭고 귀찮은 것일 테지만 엄마 세대의 여성들에겐 관계의 시작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화분으로 말을 거는 게 아닐까? 할 말이 없다면 일전에 줬던 그 식물이 잘 자라고 있냐고 물어보기만 해도 될 테니 말이다. 이때 대답을 잘 해야 한다. 잘 자라고 있다면 다른 화분을 또 떠 넘길게 뻔하다. 그렇다고 이번에도 죽였어,라고 말한다면 그럼 다른 걸 줄게 잘 키워봐!라고 할지도 모른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 걸까?) 어쨌거나 이런 식으로 나는 엄마에게 계속 화분을 받아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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