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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Nov 15. 2017

기록

설명서 대신 읽는 소설

아이의 고모는 혜진보다 아이 둘을 먼저 키워본 터라 늘 육아에 자신만만하고 해박했다. 그러나 혜진은 그녀의 생각과 달리 아이가 잘 설 수 있는 적당한 위치의 벽에 자라는 아이의 키를 기록해두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의 고모가 사다 준 키재기 도구를 이용해 한두 번 사용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익숙해져 버렸고 벽에 기록해 놓는다는 걸 잊고 지냈다. 





날씨는 이대로 계속 추워질 모양이다. 10월에 접어들어선 춥다가도 반짝하는 햇빛에 더워져 겉옷을 벗어놓고 다니기도 했는데 말이다. 아무려면 11월인데, 벌써 연말이고 다음 달이면 크리스마슨데. 혜진과 함께 점심을 먹은 연필 데생 동호회 사람들은 커피를 홀짝이며 한 마디씩 거들었다. 오늘은 체크 패턴 테이블보를 깐 탁자 위에 놓인 사과 3개의 스케치를 마쳤다. 구도 잡느라 시간을 다 잡아먹어서 남들은 1차 데생까지 들어갔지만 혜진은 하얀 스케치북 위에 선으로만 사물을 채우고 마무리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생머리의 젊은 대학생 선생님은 구도가 매우 안정적이라며 끝까지 완성을 잘 해서 학원에 걸어 놓으면 좋겠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혜진 씨, 그림 실력이 점점 느는 것 같아. 좀 느리기는 해도 언제나 혜진 씨 그림이 완성도가 제일 높잖아. 안 그래?”


밀크티를 마시느라 입술에 하얀 거품을 묻힌 미영이 말했다. 미영은 언제나 혜진의 기분을 살피며 기운을 돋아주려 노력했다. 거듭되는 칭찬에 머쓱해진 혜진은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다가 그 손을 그대로 커피잔을 들어 우유가 들어간 라테를 마셨다. 적당히 식은 라테는 오늘따라 더 부드럽고 연한 게 입맛에 맞았다. 그림을 그리고 점심을 간단히 먹은 후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수요일 하루의 절반이 흘러있다. 아이가 그렇게 되고 난 뒤엔 시간을 없애는 게 일이어서 어떻게든 뭐라도 하지 않으면 혜진의 시곗바늘은 망부석처럼 멈춰있었다. 연필 데생 동호회는 혜진이 방 문을 열고 나올 수 있는 유일한 계기였다. 


늘어진 해가 거실에서부터 주방까지 기울어졌을 때 혜진이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섰다. 아무도 없는 썰렁한 34평 아파트. 신발을 벗고 발을 디디자 바닥이 꽤 차가워 혜진은 얼른 보일러를 켰다. 아이가 있었다면 예약으로 해놓고 3시간마다 보일러가 돌아가도록 해놨을 것이다. 한동안 추위나 더위도 느끼지 못하고 살았던 터라 혜진에게 계절 감각은 사치나 다름없었다. 어깨를 지그시 누르던 물방울무늬 머플러를 풀어 침대 위에 던져 놓고 물을 한 잔 마신 뒤 불현듯 금요일 수업 시간에 가져가야 할 4B연필이 생각났다. 까먹기 전에 미리 가방에 챙겨둘 생각으로 작은방 문고리를 돌렸다. 순간 어느새 아무렇지 않게 이 방에 들어설 수 있는 자신이 낯설었지만 정말 사람의 일이란 건 시간이 해결해주는 모양이었다. 연필을 찾아 책상 서랍을 이리저리 뒤지는데 하얗고 기다란 뭔가가 혜진의 눈에 들어왔다. 형광등을 켜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건 아이의 키를 재는 도구였다. 평평한 바닥 위라면 어디서든 아이의 키를 바로 잴 수 있었다. 아이의 머리에 수평으로 대고 버튼을 누르면 바로 아이의 키가 작은 화면 위에 떴다. 뿐만 아니라 앱과 호환되어 아이가 얼마나 자랐는지 한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물건은 깔끔한 성격의 아이 고모가 사다 준 거였다. 


“벽에 찍찍 그어놓지 말고 이걸로 재요. 벽에 그어서 애들 키 기록해 놓는 거 낭만적이긴 한데 난 지저분해서 싫더라구요.”


아이의 고모는 혜진보다 아이 둘을 먼저 키워본 터라 늘 육아에 자신만만하고 해박했다. 그러나 혜진은 그녀의 생각과 달리 아이가 잘 설 수 있는 적당한 위치의 벽에 자라는 아이의 키를 기록해두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의 고모가 사다 준 키재기 도구를 이용해 한두 번 사용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익숙해져 버렸고 벽에 기록해 놓는다는 걸 잊고 지냈다. 


훗날 혜진의 아이와 같은 버스에 타고 있다 사고를 당한 아이의 엄마를 만나 이야기하던 중 아이의 장례를 치르고 집에 돌아가 물을 마시려고 주방에 갔다가 모퉁이 벽에 삐뚤빼뚤하게 그어진 98.7cm를 보고 다시 오열하고 말았다는 울먹임에 혜진은 그나마 아이의 그런 흔적이라도 남아 있는 것과 없는 것 중 이제와 어느 게 더 나은 것인지를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 자신이 허망하고 어이없었지만 생각은 그런 데까지 미치기 마련이었다. 혜진은 서랍에서 그것을 꺼내 손에 쥐어보고 버튼을 눌러볼까 했지만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아 도로 서랍에 넣었다. 


끝.



<어린이 인바디 신장계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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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뉴얼 노블은 어려운 설명서를 잘 읽지 못하는 저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시작된 연재물입니다. 

어려운 설명서, 복잡한 구매 후기 읽기보다 짧은 소설 한 편으로 제품이 이해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현재 29CM 앱을 통해 일주일에 한 번씩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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