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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Mar 08. 2018

당선이 안 될 거란 생각은 안 했다

1일1리뷰: 믿는 대로 이뤄진다는 말은 틀린 게 아닌가 봐

소화제 두 알을 삼켰다. 요즘 왜 이렇게 식욕이 돋는지 모르겠다. 돌아서면 배고프고 돌아서면 배고프다. 내 배는 신용카드처럼 계속 누적되고 있다. 허리를 쭉 펴지 않으면 불룩 나온 배가 영 불편해 5분도 편히 앉아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척이게 된다. 미련스럽게 많이 먹고 나서 매번 이렇게 후회해 봤자 뭐하겠나. 여름도 다가오는데 이 뱃살을 빼지 못하면 우짤꼬… 


더부룩한 배를 두드리며 뒤죽박죽인 책장을 살펴보다가 오늘은 연한 보랏빛 커버가 차분한 박완서 작가의 ‘나의 만년필’이란 산문집을 꺼내보았다. 틈틈이 읽다 보니 다 읽긴 했는데 언제 마지막으로 읽었는지는 선뜻 기억나질 않는다. 도그이어가 하나도 없고 밑줄만 잔뜩인 걸 보면 외부로 갖고 나가지 않고 회사 책상에서만 읽은 모양이다. 자식들 어느 정도 다 키워놓고 마흔이 넘어 처음 써본 소설이 당선돼 등단한 박완서 작가의 일화는 이미 유명하다. 그녀처럼 칼을 갈 듯 쓰지도 않았으면서 그 일화에 깃대 나도 언젠가는… 하면서 괜히 한 번 달콤한 미래를 상상해 보기도 한다. 


이 산문집에서 가장 많은 밑줄이 있던 ‘중년 여인의 허기증’ 편을 다시 한번 읽어 보았다. 박완서 작가가 처음 글을 쓰게 되던 때의 이야기다. 1970년 봄 어느 날 단골 미장원에서 차례를 기다리다가 우연히 ‘여성동아’를 보게 되고 거기서 여류 장편소설 모집이란 공고를 보고 갑자기 가슴이 두근대 소설을 쓰기 시작. 마감까지 3개월가량 남았고 그녀는 가족들 몰래 소설을 쓰기로 한다. 희한한 것은 소설을 쓰면서 당선이 안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건 무슨 촉일까?) 뭐에 홀린 듯 날마다 꼬박 40장씩 글을 썼단다. 그게 바로 작가의 처녀작 ‘나목’이다. 1천2백 장 정도의 글을 완성시키고 우송을 끝마치고 돌아오는 길 그녀는 홀가분함이 아닌 허전함을 느낀다.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하나? 그녀가 글을 얼마나 신나게 썼는지 알 수 있다. 

그렇게 보낸 글이 당선이 되고 날아갈 듯 기뻤단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좋아했는데 뭐가 그렇게 좋으냐 물으니 가정환경 조사서에 엄마 직업을 ‘무’가 아니라 ‘작가’라고 쓸 생각에 신이 났다고.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 말을 듣고 애들만큼 장차 소설가가 될 각오가 서질 않아 뜨끔했단다. 그 뒤로 그녀는 어마어마하게 열심히 글을 쓰기 시작한다. 쉽게 쓴 소설이 쉽게 당선이 되고 거꾸로 당선된 이후 더 열심히 글을 마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잡문 하나를 쓰더라도, 허튼소리 안 하길, 정직하길, 조그만 진실이라도,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진실을 말하길, 매질하듯 다짐하며 쓰고 있지만, 열심이라는 것만으로 재능 부족을 은폐하지는 못할 것 같다.”


나는 작가들의 이런 일화를 매우 좋아한다. 그들의 험난했던 과정을 살펴보면 왠지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운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꽤 왜소한 몸집의 박완서 작가는 식단도 간소했을 것 같다. 배가 부르니 글이고 뭐고 만사가 귀찮다. 누적된 살부터 빼야겠다. 가벼운 몸이 되어 신중한 신경으로 예리하고 밀도 있는 글을 쓰고 싶다. 



#나의만년필 #박완서 #문학동네

#에세이가 아닌 ‘산문’을 접하고 싶을 때 읽으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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