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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Aug 30. 2016

시 읽는 버스 기사

책 읽다 말고 딴생각하기 

커피 잔을 내려놓고 책꽂이에서 책을 몇 권 집어 들었다. 을 펼쳐 들고 한때 줄을 그어놓았던 문장들을 다시 접해보는 것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모른다. 내게 인상 깊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내가 무엇을 느꼈고 정말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 확인해보는 것이다. 
<파비오 볼로 ‘아침의 첫 햇살’을 읽다가>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였을 것이다. 그 당시 학교 근처에 살았던 나는 신도시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버스를 타고 통학을 해야 했다. 버스라는 게 반복의 산물이다 보니 하교 시간이 거의 비슷하면 내가 타는 버스의 운전기사도 늘 같은 사람이기 마련이다. 왜 갑자기 그때 생각이 났을까, 아마도 ‘차에서 시를 읽는다’는 내용의 글을 쓰다 보니 그랬나 보다. 그 남자는 다른 버스기사보다 젊은 편이었다. 아마 지금 내 나이보다도 어렸을 것 같은데, 하교 시간 학교 앞 버스 정류장에서 집에 가는 버스를 타면 일주일에 3, 4번은 그였다. 젊다는 이유로 그가 인상적이었을 리 없다. 그는 가끔 핸들 위로 시집을 꺼내 펼쳤다. 그러니까 당시만 해도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다 보니 신호대기에 걸리는 지루한 시간을 버스기사들은 신문을 보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랬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신문 대신 늘 시집을 읽었다. 신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버스기사가 운전하다가 시집을 읽는다고? 낯설었다. 하지만 그 낯섦이 굉장히 시적이었고 멋졌다. 뿐만 아니라 버스 타는 사람들을 향해 빨리 타라고 재촉하지 않고 허둥거리는 사람을 느긋하게 기다려줄 줄 아는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내 단짝 친구였던 S는 그를 짝사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웃기는 노릇이다. 시집 읽는 버스기사를 짝사랑한 여고생. 아, 뭐 이렇게 적고 보니 나름 낭만적이긴 하다. 근데 실제로 그는 낭만적이었다. 그가 시집 읽는 걸 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 그랬을 것이다. 그는 정말 책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가 시집을 읽는 이유는 소설처럼 호흡이 길지 않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S는 그가 읽는 시집의 제목을 알아내기 위해 가진 노력을 다 기울였으나 결국 알아내지 못했다. 이유는 그 시집이 예쁜 꽃무늬 포장지로 잘 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거기서 S의 짝사랑은 짝사랑으로 끝날 거란 걸 예감했다. 하지만 S에게 표현하진 않았다. S도 알지만 인정하기 싫었을지도 모른다. 꽃무늬 포장지로 시집을 포장했다는 건 여자가 있다는 뜻이다. 내 추측대로라면 그 시집은 여자 친구 혹은 그의 아내가 선물했을 것이다. 콩깍지가 씌어도 단단히 씌었던 S가 그걸 인정할 리 없었다. S는 늘 버스를 타면 운전석 바로 뒷자리에 앉았다. 그 자리가 비어있지 않으면 그 자리 옆에 서서 집까지 갔다. 어쩔 수 없이 나도 S의 옆에 서서 가야 했다. 나는 그 자리가 싫었다. 뒷자리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마치 우리만 보고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실은 아무도 우리에게 관심 없었을 텐데…


illust by 윤지민


그로부터 약 6개월이란 기간 동안 일주일에 서너 번은 그의 차를 탔으면서도 “아저씨 뭐 읽어요?”라고 말 한마디 걸어보지 못할 정도로 S와 나는 숙맥이었다. 원래 숙맥들이 이상한 거에 꽂히고 그런다. 지금에 와서 하는 말이지만 나도 그 버스기사를 좀 좋아했던 것 같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S는 흔한 버스기사와 다른 그의 풋풋한 외모에 반한 거라면 나는 책을 읽는 그를 동경했던 것 같다. 신호대기에 걸린 버스의 운전기사가 시집을 읽는 건 그만큼 흔치 않은 일이니까.


나는 내가 책을 좋아하니까 책을 많이 읽는 남자와 결혼해야지,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하지만 책 좋아하는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책 읽는 나를 따분해하지 않고 기다려줄 수 있는 남자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그러지 못한 남자들을 만나봤기 때문이다. 의외로 책 읽는 여자에 대해 불만 많은 남자들이 더러 있다. 내가 그런 남자만 만나와서 그랬는지 몰라도 그들은 하나같이 정적이고 비활동적인 취미를 가진 여자 친구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물론 연애 초반부터 그런 걸 드러내진 않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의 취향, 취미에 대해 따분하고 심지어 답답하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의 남편은 일 년에 책을 단 한 권도 안 읽는 사람이지만(만화책은 빼고) 내가 좋아하는 책, 책 읽는 시간에 대해선 무조건 존중해주는 남자다. 다른 건 여기저기 늘어놓으면 잔소리하지만 책이 여기저기 늘어져 있는 건 뭐라 하지 않는다.(책이 인테리어 소품으로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내가 책을 읽고 있으면 내용을 궁금해하기도 하고, 얼마나 재미있는지에 대해 묻기도 한다.(하지만 읽어볼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나의 시간을 존중해준 그는 그 시간 동안 자신이 좋아하는 걸 한다.(그는 게임과 자전거 타기를 좋아한다)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 있어 각자 좋아하는 것이 분명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내가 좋아하는 건 무시돼도 상관없어, 는 연애 초반에만 가능한 일이다. 두 사람은 각자 좋아하는 게 분명하고 뚜렷해야 한다. 그래야 함께 있는 시간을 잘 버틸 수 있다. 좋아하는 게 같다면 더 좋은 시너지를 낼 수 있겠지만 오히려 같지 않아서 더 긍정적인 효과를 낼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남편에게 절대 독서를 강요하지 않는다. 권하지도 않는다. 그 또한 나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게임을 추천하지 않는다. 우린 그저 각자의 취미를 존중해줄 뿐이다.


다시 시 읽는 버스기사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그는 약 6개월 뒤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아마도 회사를 옮긴 것 같았다. 더 이상 그가 운전하는 버스를 탈 수 없었던 S는 그로부터 얼마 후 같은 독서실에 다니는 재수생을 짝사랑하기 시작했다. S는 왜 늘 짝사랑만 했을까? 나는 어제 내 차에 시집 한 권을 문짝 수납함에 꽂아 놓았다. 차가 밀리거나 신호대기에 걸렸을 때 휴대폰 대신 시집을 보기 위해서다. 3년 전인가 우연히 택시를 타고 외근을 가다가 운전하면서 책 읽는 남자를 본 적 있다. 내 눈을 의심했다. 정말 차가 움직이는 와중에 그는 핸들 위에 책을 올려놓고 달렸다. 보면서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됨과 동시에 멋지다,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나는 책 읽는 사람을 동경한다. 그게 의외의 상황이라면 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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