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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Sep 12. 2016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산다

책 읽다 말고 딴생각 하기

그리고 핸드백이라면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지녀야 할 물건들, 지갑과 열쇠와 휴대폰과 수첩과 펜과 거울과 화장품 파우치와 안경과 텀블러와 이어폰 등일 것이다. 감기약이나 생수나 썬글라스와 껌과 장갑이나 사탕이나 인공눈물과 우산이 들어있기도 하다. 그것들은 집을 나선 도시인의 일상을 담고 있다. 
<은희경 ‘중국식 룰렛’중 ‘불연속선’을 읽다가>



남편은 오늘도 야근이란다. 퇴근 시간 30분 정도가 지나서 막 회사를 빠져나가려고 가방을 싸는 액션을 취했는데 상사가 오후에 작업해서 넘긴 디자인의 수정을 요구했다며 거의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oo는 잠들었어."
"그나마 다행이네…”
"저녁 먹고 일해."
"응… 그럴게."
전날도 남편이 야근인 관계로 퇴근 후 혼자 애를 보다가 짜증이 머리끝까지 올라 결국 애한테 소리소리 지르고 후회를 한 이야기를 들은 뒤라 남편은 잔뜩 쫄아 있었다. 어쨌거나 “너무 힘들겠다”라는 위로는 건네지 못했다. 내 코가 석자였다. 그나마 오늘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이가 차에서 잠들었고 나는 뭔가 더 확실히 재워야 한다는 생각에 집 앞에서 다시 차를 돌리기까지 했다. 어차피 더 듣고 싶은 팟캐스트도 있었고(나는 종종 이 방법을 쓴다) 번화가 입구까지 돌아갔다 오는 건 그리 힘든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이 시간을 즐기는 편이다. 앉아 있고 듣고 싶은 걸 들으면서 아이와 함께 있어 죄책감은 들지 않는… 그래도 방심할 수 없다. 이랬는데 이불 위에 눕히자마자 “엄마?”라며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봐 소오름이 끼칠 때도 있으니까. 어쨌거나 아이는 다시 깨지 않았고 나는 거의 음소거 상태에 가까울 정도로 조용히 아이의 방문을 닫은 뒤 한숨을 피시식 쉬며 안방으로 가 침대에 털썩 누워버렸다. 그제야 허기가 돌았다. 3일 전 언니네 집에 놀러 갔다가 아이들 저녁거리로 주문할 때 내 몫까지 챙겨준 B도시락 세트(제육쌈밥정식)가 냉장고에 있어 그걸로 저녁을 때울 참으로 주섬주섬 가방을 정리하고 주방으로 갔다. 도시락 뚜껑을 열어보니 밥이 많이 딱딱해져 그대로 전자레인지에 넣고 2분을 돌렸다. 시간을 지켜보다가 땡 소리가 울리기 직전에 문을 열었다(아이가 깰까 봐) 밥은 적당히 데워졌다. 나는 쟁반에 도시락을 올리고 젓가락을 챙겨 다시 안방으로 갔다. 혹여 아이가 인기척을 느낄까 봐 식탁에서 먹지도 못하고 안방 문을 닫고 침대에 걸터앉아 침대 협탁에서 궁상스럽게 밥을 먹었다. 자세는 불편해도 밥맛은 꿀맛이었다. 역시 애 잘 때 먹는 밥이 제일 맛있다. 그렇게 밥을 어느 정도 먹고 긴장이 풀려서인지 나른해질 즈음 TV 리모컨을 이리저리 돌리다가(아, 저녁 시간 TV 시청은 또 얼마만인가!) ‘미니멀 라이프’에 관련한 방송에서 채널을 멈췄다. 화면에서는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 여자가 태양처럼 환한 얼굴로 자신의 집을 구석구석 소개하고 있었는데 과연 그걸 집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 정말 이사하기 전 짐을 다 뺀 집, 혹은 짐 없는 모델하우스 같았다. 여자는 장롱을 열며 다섯 벌의 옷으로 여름을 보내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원래부터 이랬던 게 아니라 원래 여기는 커다란 어항이 두 개에 김치 냉장고와 양문형 냉장고 그리고 베란다는 수십 개의 화분에 분수대까지 있어 아파트 베란다가 거의 정원 수준이었다며 과거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놨다. 두 칸짜리 화장대 서랍에 선크림, 시계, 머리띠, 팔찌 등이 다라며 호호호 웃는 모습이 어쩐지 난… 거부감이 들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는 집이 정말 행복할까?


좋다, 미니멀 라이프 좋다. 나도 여전히 물건 줄이는 것에 열심이고(얼마 전에도 ‘없애는 삶’이란 글을 남긴 바 있다) 2주 전에도 교회에서 벼룩시장에 나간다기에 안 신는 신발을 잔뜩 갖다 주기도 했다. 짐은 앞으로도 계속 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반면 나는 지난주에 무지(MUJI)에서 너도밤나무로 된 옷걸이를 샀다. 옷 방에 가로형 행거가 있는데 그 행거의 부피가 너무 커서 옷장 문을 열 때마다 뒤로 밀어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결정한 일이었다. 좁은 공간에 세로로 긴 옷걸이는 장소를 유연하게 쓸 수 있는 대안이 되었다. 그 프로그램 속 여자는 짐이 줄었기 때문에 생활이 불편한 게 아니라 행복해졌다고 말했다. 그녀의 남편 또한 전에는 짐이 너무 많아서 거실에서 쉴 때도 뭔가를 해야 될 것만 같은 생각에 제대로 쉬지 못했는데 지금은 뭐가 없으니까(거실에 소파와 TV밖에 없다) 할 일도 줄었다며 진짜 쉬는 게 뭔지 알 것 같다고 매우 만족스럽게 말했다. 그 집에서 모임이 있으면 아는 사람들은 자신이 먹을 그릇과 숟가락, 젓가락을 알아서 챙겨 온다. 그 집에는 딱 두 사람 몫의 그릇뿐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웠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살 수 없는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때 친구로부터 카톡이 왔다. 저녁밥이 너무 하기 싫어 남편한테 치킨을 시켜달래 먹었다는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았다. 나는 친구에게 지금 9번 틀어봐, 미니멀 라이프에 대해 하는데 재미있어, 라고 보냈다. 친구는 응 볼게, 라고 대답한 뒤 싱크대에서 온갖 그릇을 꺼내놓고 정리하는 (다른 집) 주부가 나오는 장면에서 “딱 나네 ㅋㅋ”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릇은 딱 밥그릇, 국그릇, 접시는 3개, 냄비 하나 프라이팬 하나. 딱 이만큼의 부엌살림을 갖고 살아가는 (또 다른 집) 여자가 나오는 장면에서 나는 “난 저렇겐 못살아. 세상에 예쁜 게 얼마나 많은데.”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친구는 내 의견에 동의하는 듯 “ㅋㅋㅋ”를 날렸다.


illust by 윤지민


방송은 의미 있었다. 그래도 물건에 치여 사는 것보단 없는 게 낫다, 에는 나도 동의한다. TV를 끄고 빈 도시락이 담긴 쟁반을 들고 주방으로 나왔다. 아이의 기척을 살피니 여전히 꿀잠 중인가 보다. 나는 안심하고 설거지를 하기 위해 싱크대 앞에 섰다. 어린이집 가방을 열어 도시락 식판을 꺼내고 텀블러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좀 전 방송에서 열 개가 넘는 아이 물병과 텀블러를 늘어놓고 이걸 다 왜 모아놨을까, 하는 여자의 모습이 떠올라 싱크대 선반을 열었다. 이제 겨우 16개월인 아들의 물병이 자그마치 다섯 개였다. 주로 쓰는 것 한 가지 외엔 거의 사용조차 하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는 사람에게 선물 받은 것도 있고 내가 직접 산 것도 있었다. 지인이 쓰기 좋다며 물려준 것도 있었다.
적당히 산다는 건 뭘까. 이런 경우 아, 저 집에 텀블러 많아요, 라고 딱 잘라 거절하는 게 맞는 걸까? 어머 이런 걸 다, 라며 흔쾌히 받는 게 맞는 걸까. 허기사 정답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가는 길이 정답이라며.

나를 보여주는 물건들


깔끔한 걸 떠나서 적막한 미니멀 라이프보다 사람 사는 냄새나는 걸 더 동경한다. 집에 물건이 사는 건지 사람이 사는 건지 알 수 없는 상태를 원한다는 게 아니다. 물건의 필요성을 느끼고 그 물건을 사용하면서 즐겁고 편해지는 삶. 추억이 있는 물건을 바라보며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인생, 그 정도면 충분하다. 오래전 한 남자가 창고를 마련해 아이가 아기였을 때부터 사용하던 물건과 장난감을 버리지 않고 모아둔다는 이야길 들었다. 남편에게 그 이야길 했더니 남편은 어느 정도 남자의 생각을 수긍하며 자신은 창고까지 얻어줄 형편은 안 되지만 커다란 박스에 아주 중요한 것 몇 개정도만 차곡차곡 모아주고 싶긴 하다고, 네가 썼던 크레파스야, 이건 네가 처음으로 탔던 자전거의 바퀴란다, 라고 말해주고 싶다고 했다. 나는 물건에 담긴 이야기를 좋아한다. 물건으로 풀어나가는 소설이나 에세이도 즐겨 읽는다. 내가 머무는 공간, 그게 집이든 사무실 내 책상이든 내 취향이 담뿍 담긴 물건들로 채워졌으면 좋겠다. 물건으로 그 사람의 취향을 짐작하는 것도 흥미롭지 않은가? 물건은 짐이기도 하지만 삶이기도 하다. 맘에 드는 물건과 긴 시간 여행하듯 늙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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