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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목 Apr 18. 2019

우리가 우리가 되기까지

옷의 일기 \ 흩어지고 모이던 날들




오늘은 동료 수빈의 생일, 나는 작업실에 출근한다. 작은 조각 케이크를 사다가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돌아오는 수빈을 맞이할 것이다. 점심을 먹고 바통 터치하면 그녀는 작업을 시작할 것이고 나는 또 다른 직장으로 출근해야 한다. 우리는 같이 달리기도 하고 이어 달리기도 하며 지낸다.


그녀와는 스물두 살에 비로소 친해졌다. 스무 살 대학 신입생 오티에서의 그녀 모습을 정확하게 기억한다. 마른 다리에 훌렁하게 맞아떨어지던 보랏빛 추리닝 바지, 도드라진 광대뼈가 웃을 때 봉긋 솟아나던 환한 얼굴. 목소리도 움직임도 작았던 수빈은 알고 보니 고등학생 때부터 옷을 공부한 실력자였으며 사람들이 그녀 주위로 많이 모여들었다. 땀, 이라는 예쁜 이름의 과 동아리도 수빈이 만들어 이끌었는데 소위 아웃사이더였던 나는 거기 들고 싶어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옷은 좋았지만 어울릴 수 없던 과 분위기에 잘 적응하지 못했고 다니던 중 국문학과로 전과를 신청하기도 했다. 전과 신청은 승인되지 않아 그럭저럭 다른 교양 수업들에 정을 붙이며 학교에 다녔다. 동기들이 과방에서 중국음식을 시켜 먹을 때 나는 홀로 도서관에 갔고, 서가에 가장 안온한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두기도 했다. 시와 소설 옆에 있으면 이유 없이 맘이 편안했다. 학교에 커다란 애착이 없었음에도, 아름답기로 유명한 학교 도서관만은 자랑스러웠다.


도서관에 가는 것이 더 이상 힘들어진 때는 졸업작품 준비 기간이 시작되면서부터다. 수빈과 친해진 것도 같은 시점이다. 그 해엔 모두가 선망하는 영국 패션학교 출신의 외국인 교수님이 우리들의 졸업작품을 담당했다. 일종의 행운이었다. 모든 것을 영어로 설명해야 했지만 디자이너의 의도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더 잘 이해하려 노력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적재적소에 한 마디씩 건네는 조언이 기적처럼 작품을 살려냈다. 처음부터 열심히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정해져 있었고 수빈과 나는 부지런한 사람들 틈에서 교수의 애정을 듬뿍 받았다. 수빈은 졸업작품위원회 간부로 그와 상의할 것이 많아 내가 그녀와 교수 사이에서 말을 옮겨주며 더 가까워졌다.


작품을 준비하는 두 학기 내내 붙어 다니며 서로의 작업을 살펴봐주고 칭찬해주고 응원해주었다. 각자 만들어내고 있는 것들이 서로가 보기에도 무척 아름다웠다. 동대문에 함께 원단을 끊으러 다니고, 아침부터 밤늦도록 309호 졸작실에서 재봉을 열심히 돌렸으며 때가 되면 맛있는 것을 함께 먹었다. 훗날 수빈과 함께 옷 만드는 일을 한다면 참 좋겠다는 막연한 소망이 있었다. 그때 내가 그 소망을 씨앗으로 심어둔 것이다.


졸업 후 수빈과 나는 각자 일터를 찾아 흩어졌다. 종종 만나 근황을 물었으며 무거운 대화를 나누진 않았지만 멋진 브랜드의 디자이너로서 살아가고 싶은 깊은 열망을 매번 확인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꿈꾸던 브랜드에 입사했고, 과도한 업무와 형편없는 임금, 상사의 언어폭력에 시달리다가 내상을 입고 퇴사했다. 그녀는 대기업에서 얼마간 인턴으로 일하며, 켜고 끄는 스위치만도 못한 부품이 된 기분을 느꼈고 정규직 전환에 실패했다.


우리 것을 해볼까. 갑작스럽지만 오래 품어왔던 이야기가 서로의 입 밖으로 나온 날은 그로부터 또 한참이 지난 2017년 12월 30일이다. 길을 멀리 돌아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딱 적당한 때 적당한 모습으로 다시 만났다. 실행력이 전혀 없다고 봐도 무방한, 우물쭈물하기를 제일 잘하는 우리들은 이듬해 부지런히 준비하고 추진하여 정말 브랜드를 하나 만들었다. 몇 해 전 심어 두고 잊었던 씨앗이 멈추지도 않고 자라 피어나던 가을이었다.


요즘 우리는 우리가 마련한 세계 안에서 우리 마음에 꼭 드는 옷을 지으며 지낸다. 아직은 우리가 이 일을 먹여 살리는 처지이지만, 언젠가 이 일이 우리를 먹여 살릴 수 있게 되겠지. 얼마나 많은 사건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우리니까, 혼자가 아니라 우리니까 괜찮다고 말한다.


이 글에 우리, 라는 말이 많아 좋다. 오늘은 청색 셔츠가 탄생하는 날이다. 탄생의 순간을 함께 맞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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