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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목 Apr 02. 2019

고작 실패를 하려고

옷의 일기 \ 편지를 빌려 하는 말




이제 거기도 한 시가 넘었겠네요.

더위는 여전한가요? 아침저녁으로 물을 준다는 풀밭은 잘 있나요? 지금쯤 다들 잠들어 있겠어요.


나는 오늘 정오에 작업실에 출근해서 일하고 돌아오니 지금 이 시각이에요.

여름에 나올 옷들을 몇 벌 만들어봤는데, 둘은 성공했고 하나는 실패했어요.


옷 하나가 나오려면, 제일 먼저 종이에 패턴을 떠야 해요. 이렇게 그리면 원하는 모양이 나올까, 불확실하고 불안하지만 믿고 치밀하게 계산하며 그려야 해요. 그다음에는 조각조각 패턴을 자르고, 원단을 낭비하지 않도록 고심하여 천 위에 옮겨 그리고, 핀을 꽂아 고정하고, 그걸 다시 하나하나 오려요. 오린 다음에는 핀을 뽑고, 오버로크도 치고, 여기저기 초크로 표시도 해놓고, 이어 붙여야 하는 부분들을 재봉틀로 박아요. 원단이 바뀔 때마다 색이 맞는 실을 꺼내 밑실을 새로 감고, 윗실을 바꾸는 일도 해야 하죠. 그렇게 박고, 다리고, 또 박고, 다리고 하는 과정을 거쳐요. 제때제때 다려 놓지 않으면 조금씩 흩트러져 정확한 모양이 나오지 않거든요. 머리를 잘라주는 사람들 보면, 자르다가 시시때때로 머리를 곧게 빗어 살피잖아요. 다림질은 그와 비슷한 일이에요.


서로 너무 다르게 생겼어도 맞닿는 곳을 잘 맞추어 열심히 연결하다 보면 조금씩 조금씩 옷의 형태가 갖추어져요.

막 태어나려고 할 때. 이때 가장 떨리고 걱정돼요.


우리는 수십 년 경력이 있는 테일러나 미싱사도 아니고, 공장처럼 좋은 장비를 여러 대 가지고 있는 상황도 아니라 이렇게 하기까지 이미 오랜 시간이 걸려요. 그리고 정말 완성되기 전까지 성공과 실패를 절대 예측할 수 없죠. 일단은 만들어 놓아야 알 수 있어요. 우리는 그 "일단은"을 위해 뭐든 너무 열심히 해야 해요.


완성본이 생각했던 모양대로 짠! 하고 나오면 정말 좋겠지만, 그런 경우는 정말 드물어요. 대부분 수정을 여러 번 더 거쳐야 하죠. 이 모든 과정을 몇 번 더 반복해야 한다는 의미예요.


성공만 하기에도 바쁜데. 고작 실패를 하기까지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어요. 그래도 하루에 단 하나의 성공만 있으면, 그 힘으로 실패를 극복할 수 있어요.


오늘은 둘이나 성공했고 하나만 실패했기 때문에 다행인 날이었어요.



밤늦게 작업실에서 나왔는데 동료가 핸드폰을 들고 동동거리는 거예요. 애인을 만나러 가고 싶은데 전철이고 버스고 다 끊겨서. 서울 안에서도 먼 거리라 선뜻 택시를 잡지도 못하고, 포기하며 집으로 돌아가려는 친구를 거기까지 데려다주었어요.


길을 조금 돌아 돌아 나도 집으로 왔네요. 퇴근길 운전은 거의 늘 혼자 하는데, 오늘은 둘이서 나지막이 대화하며 한적한 도로를 달렸어요. 누군가 정말 나를 필요로 할 때 도움이 되어줄 수 있는 게 좋더라고요. 먼 길을 또 가야 하는 내게 못내 미안해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환하게 빛나는 친구 표정을 흘끔흘끔 훔쳐볼 수도 있었어요.


미안해하지 말고, 더 활짝 웃어도 된다고 말해줄 걸 그랬네요.

하루를 조각내고 늘려서라도 사랑하는 사람 만나러 가고 싶은 마음을 이제는 나도 잘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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