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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목 May 14. 2019

아름다움의 실물

옷의 일기 \ 백스테이지 이야기




런웨이의 백스테이지는 차분함과 급박함이 공존하는 신기한 공간이다. 모든 것이 빠르게 돌아가는 와중에도, 머리를 다듬고 옷을 여미고 착장을 살피는 눈과 손들은 묵직하게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다.

패션쇼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단연 모델이다. 입어줄 이가 없다면 옷은 옷만으로 빛날 수 없다. 그러나 모델은 무대 뒤에서보다 진짜 무대 위에서 더 중요하다. 나는 백스테이지의 없어서는 안 될 인물로 헬퍼를 꼽는다. 헬퍼는 말 그대로 helper, 돕는 사람이다. 단순히 돕는 것 이상의 일들을 하기 때문에 그보다 더 무거운 이름을 붙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헬퍼는 모델이 런웨이를 돌고 들어오면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다음 착장을 지시대로 완벽하게 갈아입히고 매무새를 다듬어 다시 내보내야 한다. 런웨이에 서는 착장은 대부분 한 벌로 끝나지 않고, 여러 겹을 입히거나 또 입히는 방법이 정해져 있어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무엇이든 놓치기 십상이다.

내가 헬퍼로 무대 뒤에서 땀 흘리며 뛰어다닌 것은 스무 살, 대학 1학년 때이다. 학교에서 공연장으로 많이 쓰이는 건물이 우리들의 졸업 패션쇼 장소였고, 백스테이지는 객석에 마련되어 의자 사이사이에 행거를 놓고 불편하게 옷을 갈아입혀야 했다. 4학년 선배들은 우리들이 행여 옷을 잘못 입혀 내보낼까 봐 좋은 말로 여러 번 일러주기도 하고 리허설이 끝난 후 득달같이 달려와 꾸짖기도 했다. 압도하는 긴장감 속에서 바지인지 양말인지 잘 알 수 없는 옷을 낑낑거리며 벗기고 입혔다. 나보다 족히 20센티는 큰 모델들의 몸을 만지고 신발을 신기고 하는 일들이 처음에는 어색하고 어려웠지만 두 번의 리허설과 두 번의 쇼를 하면서 그들이 그저 마네킹 같이 느껴졌다. 그들은 몸에 아무런 감각이 없는 사람들 같았고, 괴이하게 생긴 불편한 옷들에 이골이 난 것 같았다. 모델들이 입고 걸으며 즐거울 수 있는 옷을 만들겠다고 그날 다짐했다. 편안하지만 초라하지 않은, 멋진 걸 만들겠다고.

처음 쇼를 올렸을 때, 모델이 내 옷을 입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심지어는 헐렁하고 가벼운 옷에 해방감을 느끼는 것도 같았다. 그 작품들로 상을 받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헬퍼가 착장 한 가지를 잘못 입혀 내보냈는데 아직까지 마음에 두고 있다. 모델들이 나가기 직전 들어가 한 번 확인하기까지 했는데 나도 실수를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디자이너는 실제 런웨이의 모습을 구경하지 못한 채 무대 뒤에 있다. 물론 커다란 쇼에서는 백스테이지에 화면을 두고 확인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무대와 관객의 반응을 살필 수 없다. 거울이나 화면을 통하지 않은 자신의 실물을 영원히 직접 보지 못한다는 점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러나 쇼가 무사히 끝나고 무대 위로 나가 인사를 할 때, 박수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올 때, 웃는 얼굴들이 풍선처럼 떠오를 때의 쾌감은 결코 잊을 수 없다.

며칠 전, 다시 패션쇼에 오를 기회가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마감을 하여 며칠 잠도 잘 자지 못하고 작업을 해야 했지만 또 한 번 백스테이지로 들어가 우리 옷을 입은 모델들을 보았고, 무대 밖을 궁금해했고, 아찔하게 떨다가 짧은 인사를 한 후 다시 백스테이지에 돌아왔다.

우리가 만든 아름다움이 도를 넘어 사방에 가득 넘쳐흐르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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