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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유미 Feb 23. 2019

청춘, 소비해선 안 되는 푸른 봄

[커피 한 잔과 함께 읽는 글]

_커피 한 잔, 건강하게 디카페인





나는 간혹 유튜브에 올라오는 아이돌 영상을 본다. 그림 작업을 할 때는 대부분 노래를 틀어놓는데 종종 영상과 노래가 함께 나오는 유튜브를 틀어 놓기도 한다. 그럼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다가 문득문득 고개를 들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나에게 없을 생기로 가득한 그 아이들을 보는 것이다.



한 번은 별생각 없이 틀어놓은 영상을 보다가 춤을 추는 아이들 중 한 명이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 춤을 추는 내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숨을 참거나 내뱉으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럼에도 한 곡의 춤과 노래가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중간에 다음 곡을 소개하는 멘트가 이어지는 순간 기어이 쓰러지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는데 가슴이 철렁했다.



저 아이를 저렇게 멈추지 못 한채 춤추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 춤을 멈추지 못하는 빨간 구두라도 신은 걸까. 아니면 그 아이에게 ‘완성’ 혹은 ‘완벽’을 요구하는 어른들의 시선이 그렇게 만드는 것일까.



왜 쓰러진 걸까, 어디가 아픈 걸까, 괜찮은 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 인터넷에 찾아봤다. 독감이었던 모양이다. 독감에 걸린 상태에서 배와 허벅지가 훤히 보이는 옷을 입고 춤을 추었단 말인가. 그렇게 하는 걸 두고 보기만 한 어른은 대체 누구였을까.



‘청춘’이라는 말이 있다. 푸를 청에 봄 춘자를 쓰는 그 단어는 단연 생동감 넘치는 에너지를 가진 우리네 10대부터 20대까지를 아우르는 말이다(요즘엔 30, 40대도 청춘이라 하지만 일단 그건 차치하고). 그리고 글에서부터 풍겨오는 그 싱싱함을 사람에 대입한다.



하지만 나뭇잎은 다가오는 봄을 위해 시들어 떨어지더라도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열이 오르고, 온몸의 살갗이 공기에 닿기만 해도 아픈 그 순간에도 시들 수 없는 삶을 살게 한다.



잠시 쉬고 싶다고, 쉬면 안 되냐고 그런 말도 할 수 없도록 그 어린 ‘청춘’을 몰아붙이는 게 나름의 신념을 가지고 일에 임하는 그 자신일지, 아니면 그 아이로 인해 얻어질 과실을 계산기 두드리듯 산술 할 어른 일지 혹은 멈추어서는 아무것도 얻을 게 없다고 강압하는 사회일지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그럼에도 아이야, 쉬어라. 일단 멈춰서 쉬어라,라고 하는 말이 일면 그 아이의 인생에 무책임으로 비칠까 두려워지는 건 내가 다를 바 없는 어른이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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